[YS서거]'우리가 남이가'와 지역주의 고착화…그가 남긴 '아픈 숙제'

[the300]90년 3당합당·92년 초원복집사건…영·호남 갈등 격화 결정적 계기

유동주 기자 l 2015.11.23 05:55
22일 오전 0시 22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병으로 서거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2년 민주자유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후 김종필 전 총리, 박태준 전 의원과 손을 맞잡아 들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 기록관) 2015.11.22/사진=뉴스1

22일 오전 0시 22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병으로 서거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주도하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모습. (김영삼 대통령 기록관) 2015.11.22/사진=뉴스1


22일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해 현 야권성향 지지자들이 가장 크게 아쉬워하는 대목은 '3당합당'과 그로 인한 '지역주의 고착화'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DJ의 평민당에 패해 제1야당을 내주면서 통일민주당을 이끌던 YS는 활로를 '3당합당'에서 찾았다.

수 십년간 야권 인사로 활동해 온 YS가 1990년 1월 군사정권의 후계로 평가받던 노태우 대통령과 박정희 정권 2인자였던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와 합당을 한다는 소식은 당시 전 국민을 충격에 빠트렸다. 특히 야권 성향의 지지자들은 경악했다.

집권 여당인 민주정의당과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은 곧 '민주자유당'을 만들어 합당했다. YS는 "호랑이 잡으러 호랑이굴에 들어간다"고 했지만 노무현, 이기택 등 일부 세력은 이탈하며 '야합'이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속칭 '꼬마 민주당'으로 불린 '민주당'을 창당하기도 했다.

YS와 DJ라는 정치 거물이 둘 다 야당 지도자로 영호남을 대표했을 때에 비해, YS가 여권에 합류하고 DJ가 야권에 남으면서 둘을 지지하는 영호남인들도 자연스레 정치적 대립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야당내 라이벌에서 여당과 야당 대선주자라는 구도는 지지층 변화로 인한 '이념 대결'구도까지 덧칠해져 둘 사이의 갈등은 격화됐다.

영호남 사이의 '지역 주의' 갈등이 정치권 대립 영향을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결국 박정희 정부 몰락의 신호탄이 된 '부마항쟁'의 전통 야도(野都) 부산지역이 현 여권 옹호 지역으로 바뀌면서 산업화와 군사독재 부산물로 싹 트던 지역주의 구도가 '호남 고립' 형태로 바뀌게 된다.

특히 YS가 당선된 1992년 대선과정에서 폭로된 부산 초원복집 사건은 지역감정에 불을 붓는 격이었다. 김영삼 당시 민주자유당 대선 후보를 공격하기 위한 정주영 당시 통일국민당 후보 관계자들의 도청으로 김기춘 당시 법무부장관과 부산 기관장 등에 의한 관권선거·지역감정조장 모의가 밝혀졌지만 이는 YS에게 '독(毒)'이 아니라 '득(得)'이 됐다.

'우리가 남이가, 이번에 안되면 영도다리에서 빠져 죽자'라고 했다는 김기춘의 발언은 정주영측의 폭로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면서 오히려 영남 유권자들의 위기감을 자극해 YS당선에 일조한 셈이 됐다.

현 여권 실세 중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등 YS를 야당시절부터 따랐던 상도동계 정치인들은 정치입문은 독재에 맞선다며 '야권'에 들어갔으나 YS를 따라 '여권' 정치인으로 졸창간(卒倉間)에 변신할 수 밖에 없었던 인사들이다.

게다가 이들의 지역기반이던 부산 등 경남지역 정치인들은 소속 정당이 바뀌면서 '야성(野性)'이 퇴색됐고 호남지역을 대표했던 DJ진영과의 정치적 대립도 격화됐다.

이러한 '지역주의 정치 고착화'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하는 등 부산지역을 전통 야권 지지층으로 되돌리려는 노력을 했지만 YS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부산 민심을 거스르는 것이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22일 오전 0시 22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병으로 서거했다.김영삼 전 대통령이 민주화 추진협의회 공동의장인 김대중 전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 기록관)2015.11.22/사진=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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