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은의 폴리티션!]'악덕상인' 보수와 '불량품' 반기문

[the300]'보수의 소모품'을 향한 20일간의 대소동

김태은 기자 l 2017.02.05 11:39



"보수의 소모품."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드디어 정치 현실을 제대로 짚어낸 말을 했다. 대선 출마 포기에 이르러서야 얻은 깨달음이라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지난 1일 반기문 전 사무총장의 대선 불출마 선언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반기문 대선캠프'에 줄을 대고 있는 정치권 인사들이 일제히 '멘붕'에 빠졌다. '이제는 정말 제대로 한번 해보자'며 의욕을 불태우고 있던 차였다. 문제점으로 지적돼온 대선 캠프 조직은 설 연휴 직후 김숙 전 유엔대사 대신 권영세 전 주중대사를 주축으로 재정비에 들어간 참이다. 오세훈 바른정당 최고위원이 '반반(半半) 행보' 대신 캠프 합류를 확정지었고 종합상황실장에 외교관 출신 전직 국회의원을 인선했다. 불출마 선언이 있기 불과 하루 전의 일이다.

 

캠프 관계자들뿐만이 아니다. 새누리당과 바른정당 등에서 반 전 총장만 바라보던 여권 인사들은 망연자실했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며 황당해하기도 하고 "이렇게 결기가 없느냐"며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지지율이 하락세라고는 하지만 반 전 총장이 유일한 대안 아니냐는 게 여권 내부의 시각이긴 했다. “모두가 반 전 총장만 바라보고 있는데 겨우 20일만에 포기하는 것은 무책임하고 정치의 기본도 아니다”라는 여권 인사의 토로도 어느 정도 이해간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정작 반 전 총장이 외쳐온 “정치교체와 국가통합을 이루려했던 순수한 뜻”이 좌절된 것을 아쉬워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대부분 인사가 반 전 총장이 만들고 싶었던 나라, 그가 대통령이 되고 싶었던 이유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에겐 꼭 ‘반기문’이어야 할 이유는 사실 없었다. 야권과 싸울 가능성만 보여준다면, 보수 진영을 대표할 모습만 보여준다면 반기문이든 황교안이든 큰 차이가 없다.

 

반기문 캠프를 지켜봐온 한 정치권 인사는 "자업자득"이라며 "그 사람들은 반기문이란 상품이 어떤 건지도 모르고 국민들에게 팔려고 한 악덕상인아니냐"고 힐난했다.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이 1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선불출마를 선언 한 후 자리를 뜨고 있다. 반 전 총장은 "정치교체를 이루고 국가 통합을 이루려 했던 순수한 뜻을 접겠다는 결정을 내렸다"며 대선출마 포기 입장을 밝혔다. 2017.2.1/뉴스1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대선 불출마 선언 후 정치권에 적대적인 반 전 총장의 발언에도 이 같은 시각이 묻어나온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정치권 풍토를 반성하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반 전 총장이 간과한 바가 있다. 자신이 정치 지도자가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자질을 갖추진 못한 '불량품'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반 전 총장에겐 반드시 대통령이 돼야 하는 자기확신과 권력의지가 부족했다는 것이 그를 지켜본 이들의 결론이다. 그러다보니 매일매일 흔들렸다. 반 전 총장은 이미 지난달 초 귀국 직전에 한 차례 대권 도전을 두고 포기를 고려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반 전 총장의 동생과 조카가 미국 뉴욕연방법원에 기소된 즈음이다. 20일 간의 짧은 대선주자 여정은 처음부터 흔들린 채로 시작됐던 것이다. 


귀국 직후 "음해성 정치 공작"이라고 강하게 반박하며 정면돌파하는 듯했으나 자신의 대권 도전으로 가족들의 사생활이 낱낱이 까발려지는 것이 과연 옳으냐는 물음을 던졌다고 한다. 거꾸로 말하면 "국가를 위해 이 한몸 불사르겠다"는 각오가 말처럼 쉽지 않았다는 뜻이다.


'꽃가마'만을 기다리고 '흙길'을 걸으려 하지 않을 것이란 세간의 예상도 결국 들어맞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말했든 정치는 "진흙 속에서 연꽃을 피우는 예술"이다.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온갖 모욕과 비난, 굴욕을 무릅쓰는 굳은 신념과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반 전 총장은 정당 지도자들과의 만남에서 벌어진 신경전조차 견디지 못한 채 회사원이 가슴에 품고 있던 사표를 상사 앞에 내던지듯 불쑥 대선 불출마를 발표했다.

 

한 관계자는 "반 전 총장을 가장 오랫동안 모셨던 김원수 전 유엔대사가 반 전 총장의 대권 도전을 끝까지 반대한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았겠느냐"며 "정치를 하면서 겪어야 할 갖가지 일들을 견딜만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권을 거머쥔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바로 '내가 대통령이 되지 않으면 역사에 대역죄를 짓는 일'이라고 생각할 정도의 사명감과 '반드시 대통령이 될 것'이란 확신과 의지다. 물론 이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시대 소명의 부름을 받아 부응해나가면서 단단하게 다져진다. 결코 하루아침에 이뤄질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반 전 총장과 그를 둘러싼 일부 정치권 인사들의 20일간 대소동은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라는 상품을 두고 한번 더 벌어질 수 있다. 이번에도 '보수의 소모품’을 찾는 악덕상인의 모습일지, 아니면 ‘보수의 진품’을 내놓기 위한 장인의 숨결일지…. 안타깝게도 겉모양새는 반 전 총장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