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권까지 노리는 추다르크 추미애의 '소신정치'

[the300][국회의원사용설명서 2.0]추미애 더불어민주당 의원

고석용 기자 l 2016.08.12 06:53


더불어민주당 8·27 전당대회에 출마한 추미애 후보는 지난 10일 경남 창원에서 "과거 고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사태에 연관됐던 것은 과오"라며 용서를 빌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소인 봉하마을이 있는데다 친노·친문으로 불리는 당내 주류 세력 많은 경남이었다. 추 후보는 자신의 치부와 약점을 감추지 않았다.

추미애는 현재 '친문(문재인)'계로 당 주류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과거 민주당 시절 노 전 대통령의 탄핵 사태 때 중심에 서있던 인물이다. 많은 사람들은 추미애가 친문으로 분류되는 데 대해 의아하게 여겼다. 철새 정치인 처럼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 정치인이 아니냐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오히려 추미애는 철새와 거리가 가장 먼 정치인이다. 그는 5선동안 당적을 바꾼 적이 없다. 열린우리당 창당 때도 합류하지 않았다. 정치적 아버지 격인 김대중 전 대통령(DJ)과의 의리를 지키고 당을 지켜야 한다는 소신 때문이다. 그 결과 그는 돌고 돌아 다시 더불어민주당의 주류로 떠올랐다.

그런 추미애가 이제는 당권에 도전한다. 지난 5일 추미애와 함께 '2강'으로 불렸던 송영길 후보가 컷오프되면서 추미애는 명실상부한 유력 당권주자로 떠올랐다.


[그는 누구?-세탁소집 둘째 딸에서 당권주자로]

대구의 한 세탁소 가게 둘째 딸로 태어난 추미애는 어려운 집안 경제 형편 때문에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떠나 외가에서 자랐다. 가난을 가까이서 겪은 그는 열심히 살지만 권익을 보호받지 못하는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어려서부터 법관이 되겠다고 다짐해왔다. 

이후 판사가 된 추미애는 1986년 1000여명의 학생을 구속한 건국대 사건 당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전환시대의 논리' 등 100여권의 책을 압수수색하겠다는 검찰의 영장을 끝내 기각했다. 그는 '판사는 양심에 따라 판단하고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추미애는 김대중 전 대통령(DJ)과의 인연으로 정계에 입문한다. 당시 DJ는 추 후보를 향해 "세탁소집 둘째 딸이 부정부패한 정치판을 세탁하러 왔다"고 평했다. 정치에 입문한 추미애는 이후 존재감을 과시하며 새천년민주당에서 최고위원까지 지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탄핵 역풍을 맞으면서 17대 총선에서 패배한 것이다.

복귀한 추미애는 최근 더불어민주당 8·27 전당대회를 통해 당권을 준비 중이다. 그는 이번 전당대회에서 주저하지 않고 당시의 탄핵 결정을 실수라 인정하며, 앞으로는 그 과오를 통합으로 승화해 당에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호소했다. 


[키워드① DJ]

김대중 전 대통령(DJ)은 추미애의 정치적 아버지나 다름없다. 1995년 DJ의 권유로 추미애가 새정치국민회의 부대변인으로 정치에 발을 담그면서부터 시작된 추미애와 DJ의 관계는 돈독했다. DJ는 "법의 양심을 믿어보겠다"며 추미애에게 정치를 추천했고 추미애는 '정치발전 없이는 사법 발전도 없다'며 정계 입문 이유를 밝혔다.

당 부대변인 직을 맡게 된 추미애는 당시 38세라는 젊은 여성이란 점에 판사라는 이력까지 더해지면서 화제를 모았다. 최초의 여성 부대변인, 최초의 판사 출신 야당 정치인 등 '최초' 수식어가 꼬리표처럼 붙었다. 고향 대구까지 주목받으면서 DJ는 "호남 사람인 제가 대구 며느리를 얻었다"고 기뻐했다. 

부대변인이 된 그 해 추미애는 서울 광진을을 지역구로 두고 16대 총선에 당선됐다. 서울 광진을은 15대 총선에서 처음 신설된 지역구로 호남세가 센 곳이었지만 경합이 벌어지던 지역이었다. 추미애는 비례대표 대신 지역구로, 이곳을 선택해 당당하게 선거에서 성공했다.

그렇게 판사 추미애에서 정치인 추미애로 자리잡은 그는  1999년 홍콩 '아시아 위크'지가 선정한 '새천년을 이끌 아시아의 젊은 지도자 20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키워드② '추다르크']

추다르크는 그녀의 또다른 이름이다. 1997년 대선에서 추미애는 김대중 캠프 선거유세단장을 맡아 전국을 누볐다. 특히 야권의 불모지인 대구에서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대구가 고향이기도 했던 추미애는 선거 20여일을 앞두고 대구로 향했다. 반(反)호남 정서 때문에 '대구에서 민주당 간판을 들고다니면 돌맞는다'는 우려에도 그는 꿋꿋이 유세 활동을 펼치며 DJ 지지를 호소했다. '잔다르크 유세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추다르크'의 시작이었다.

잔다르크 유세단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람은 남편이다. 혼자서 마이크를 잡고 지역감정과 싸워야 한다는 의미에서 붙은 이름이다. 추다르크가 대구의 득표율을 바꿔놓진 못했지만, 강력한 인상을 남기는 데는 성공했다.

[키워드③ 입당원서]

추미애는 올해 초 더민주 최고위원회에서 “저는 일생 입당원서라고는 한 번밖에 안 써봤다"며 "호적을 함부로 바꿔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실제로 추미애는 DJ와 맺은 인연으로 들어간 민주당에서 당적을 한번도 바꾼 적 없다.

이는 그의 '소신'과도 맞닿아있다. 추미애는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소신을 지켜왔다. 2002년 16대 대선까지만 해도 노무현 전 대통령과 돈독한 관계였던 그는, 2003년 노 전 대통령이 대북송금사건에 대한 특검을 수용하면서 노 전 대통령과 갈라졌다. 노 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이 DJ를 배신했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이후 추미애는 민주당의 선택이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추미애는 당을 버릴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저를 보고 기존 직업까지 버리고 정치에 들어온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당을 바꾸는 일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대신 추미애는 탄핵이 부결된 후 삼보일배를 통해 속죄했다. 선거에서 떨어지고 나서 조용히 유학을 떠났다가 돌아온 것도 속죄의 의미에 해당했다.

[키워드④ 노동법]

2009년 국회 환경노동위원장 시절 추미애는 한나라당 의원들과 단독으로 '노동조합 및 노조관계 조정법 개정안'(추미애 안)을 통과시켜 또다시 논란을 일으켰다.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과 복수노조를 시행해나가고 교섭창구 단일화하되 사용자가 동의하는 경우 산별노조의 교섭권을 보장하는 내용이 문제였다.

민주당과 민주노총 등 야권은 산별노조의 교섭권을 보장하지 않았다며 거세게 반발했다. 또 근로시간 면제(타임오프) 범위에 대해서도 모호성을 띠고 있어 논란이 일었다. 노동개악이라는 지적이 잇따랐다. 야권은 '여당과 날치기했다'며 환노위 위원장인 추미애를 비판했다. 

하지만 추미애는 이를 '소신'으로 생각한다. 추미애는 당시 비정규직으로 2년을 근무할 경우 무기계약직(정규직)으로 전환하도록 규정하는 내용의 비정규직 법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밝혔다. 노조 전임자 등을 규정한 노동조합 및 노조관계 조정법 개정안의 통과 때문에, 비정규직법 통과를 미룰 수 없어 강행했다는 것이 추미애의 항변이다.


[요!주의]

추미애는 '탄핵'이라는 단어만 봐도 울렁증이 생긴다고 했다. 2002년 16대 대선을 앞둔 당시 추미애와 노무현 전 대통령의 관계는 누구보다 돈독했다. 전당대회에서 추미애는 대선 후보로 노 전 대통령을 지지했고 노 전 대통령도 추미애를 정치적 동지라고 밝혀왔다.

2002년 16대 대선때도 추미애는 적극적으로 노 전 대통령을 도왔다. 추다르크가 돼 DJ를 도운 추미애는 이번엔 '돼지엄마'로 변신했다. 비주류였던 노 전 대통령에게 선거자금 한 푼 지원하지 않았던 새천년민주당 당 지도부를 대신해 추미애가 나섰다. 추미애는 국민참여본부 공동본부장으로 '희망 돼지 저금통'을 들고 거리로 나가 57억원의 국민성금을 모았다.

하지만 대통령이 2003년 대북송금에 대한 특검을 수용하면서 둘 사이가 갈라졌다. 당시 DJ 측 사람들은 대북 송금에 대한 특검을 정치 숙청으로 여기고 있었다. 열린우리당 창당과 분당도 대통령의 친위쿠데타로 여기던 분위기였다. DJ를 정치적 아버지로 여기던 추미애에게도 노 전 대통령의 행보가 좋게 보일 수 없었다.

급기야 2004년 탄핵 정국 당시 추미애는 민주당 최고위원으로서 탄핵의 중추로 들어갔다. 결국 탄핵은 부결됐고 민주당은 그해 열린 17대 총선에서 역풍을 맞았다. 추미애는 속죄의 의미로 삼보일배를 하며 반성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결국 열린우리당 김형주 전 의원에게 뒤처지며 낙선했다.

이와 관련해 추미애는 줄곧 "탄핵 불가론"을 견지해왔다고 주장해왔다. 본질적으로 탄핵은 정치적인 결정이며, 헌법재판소가 탄핵에 손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열린우리당을 뭉치게 하는 작용이 있고, 결국 총선 구도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노 전 대통령과도 척을 지고, 최고위원으로서 당의 실패도 막지 못한 추미애는 이 때문에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한 것이 가장 큰 실수였다'고 회상한다.



[이 한장의 사진]

추미애가 탄핵 부결 후 국민들에게 속죄의 의미로 진행한 삼보일배다. 탄핵 정국의 상황과 관련해서는 커버린 아들에게조차 설명하기 힘들다고 밝혔다. 

하지만 추미애는 최근 이 상처를 감추지 않는다. 비판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지난 10일 창원에서 탄핵 역풍의 속죄로 삼보일배를 진행한 이후 무릎 상태가 안좋아져 아직까지 높은 구두를 신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의 사람들]

추미애의 출발은 DJ 키즈였다. 이후 노무현 사람들과 참여정부 탄생에 공헌하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탄핵 사태로 당 주류와는 멀어졌다. 

하지만 현재 추미애는 명실상부한 '친문(문재인)' 주류 의원이다. 탄핵 사태 이후 멀어진 주류와의 관계는 2012년 회복됐다. 18대 대선에서 문재인 캠프의 국민통합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계기로 '친문' 계열에 동참할 수 있었다.

2015년 2·8 전당대회에서도 추미애는 문재인 전 대표를 도왔고 문 전 대표는 추미애를 지명직 최고위원으로 선출하며 주류와의 관계를 돈독히 해왔다. 이후 그는 비주류와 주류 간 분당사태에서도 당을 지키며 주류 입지를 탄탄히 지켜왔다.

현재 당권 도전 국면에서도 친문으로 불리는 주류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 문 전 대표의 복심 전해철 의원도 추미애를 지지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아울러 문 전 대표의 최측근인 최재성, 진성준, 백원우 전 의원 등도 추미애를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프로필]
△1958년 대구 출생 △한양대학교 법학과 학사 △24회 사법시험 합격 △춘천지법, 인천지법, 전주지법, 광주고법 판사 △제15~16대, 18~20대 국회의원 △2002년 새천년민주당, 2012년 민주통합당,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 △18대 국회 환경노동위원장 △더불어민주당 소녀상의눈물 운동본부, 경제정의노동민주화특별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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