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금 200만원…" 손학규의 청춘시절, '전태일평전' 출판 실무도

[the300][런치리포트]대선주자사용설명:손학규③황석영과 함께 위장취업도

정영일 기자 l 2017.02.14 04:59



손학규 국민주권개혁회의 의장이 대학시절을 보낸 1960년대 중반에서 1970년대 초반은 격동의 시대였다. 한일회담과 사카린 밀수사건, 6·8부정선거, 삼선개헌 등 한국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손 의장은 학생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무기정학 중 또 다시 데모를 하다 이중 무기정학을 받고 강원도 함백탄광에서 막노동을 한 일화가 유명하다.  

그가 주도해 만든 후진국문제연구회에는 김세균 제정구(66학번) 심재식 서중석 유홍준(67학번) 유인태 안병욱 심지연(68학번) 이철(69학번) 등 기라성 같은 운동권 인재들이 즐비했다. 법대에는 조영래를, 상대에는 김근태를 중심으로 운동권 후배 그룹이 형성돼 주변에서는 경기고 동기동창인 세 사람을 '서울대 운동권 3총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1972년 졸업 후에는 서울 구로의 전자회사에 '위장취업'을 하기도 했다. 그때 같은 공장에 또 같이 '위장취업'해 있던 사람이 소설가 황석영이다. 이후 박형규 목사의 권유로 기독교 계열 빈민선교 기관에 들어가 청계천 판자촌에서 생활하다 1년여간 수감되기도 했다. 

긴급조치 시대가 본격화된 이후에는 2년간 도피생활을 했다. 그의 목에 현상금 200만원에 2계급 특진이 걸리기도 했다. 그는 당시 강원 원주에서 협동조합 생활을 했다. 이때 경험이 18대 국회에서 협동조합기본법 발의로 이어졌다. 수배로 어머님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은 아직도 한이다. 당시 어머님의 장례식장에 참석했다 체포됐다. 

수배생활이 끝난 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에서 활동하며 수감중이던 김지하의 '양심선언'이나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 평전'을 일본에서 출판하는 일의 실무를 담당했다. 부마항쟁 진상조사 활동을 하다 또 다시 체포돼 중앙정보부에 끌려갔지만 10·26으로 유신체제가 종말을 고하며 풀려난다. 

1980년 그는 영국 브리스톨 대학에서 정치신학을 전공하고 옥스포드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1988년 귀국해 인하대와 서강대에서 정치학을 가르친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추천으로 당시 민자당에 입당하는 것으로 정치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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