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당한 '배신의 정치'…응징과 복수의 '데자뷰'

[the300] [이상배의 이슈 인사이트] '철의 여인' 대처 저격수된 최측근 원내대표

이상배 기자 l 2015.09.11 05:57


7월의 어느 날, 여성 국가 지도자는 자신의 최측근을 요직에서 단칼에 내쳤다.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였다. 10여년간 동고동락한 동지였지만, 사전 경고조차 없었다. 후임에는 한결 무난한 인물이 지명됐다. 버림받은 최측근은 여성 지도자를 향해 가시 돋힌 비판으로 맞섰다. 그렇게 보수진영은 분열됐다.

혹시라도 박근혜 대통령과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떠오를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은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수상과 제프리 하우 전 영국 보수당 하원 원내대표의 이야기다.

하우는 대처의 오른팔이었다. 대처 집권기의 약 절반에 해당하는 6년(1983∼1989년) 동안 내각의 최고 요직인 외무장관을 지냈다. 하지만 대처와 하우는 영국의 유럽 화폐통합 참여 여부를 놓고 의견이 갈렸다. 대처는 유럽 단일통화 채택에 반대했고, 하우는 찬성했다. 이런 의견 차이는 개인적 불화로 이어졌다.

1989년 7월, 대처는 사전 통보도 없이 하우를 외무장관 자리에서 내쫓았다. 그 후임이 훗날 수상이 된 존 메이저다. 하우에겐 새로 만들어진 '부수상'이라는 직이 주어졌지만, 실권이라곤 없는 '한직'이었다. 동시에 그는 하원 원내대표가 됐지만, 영국에선 외무장관 자리와 비교할 바가 아니다. 하우는 분노를 느꼈지만 일단 참았다.

그러나 1990년 10월 대처가 유럽 단일통화 불참을 공식 선언하자 하우는 폭발했다. 그는 즉각 '부수상' 직을 내던졌다. 그리곤 하원에서 사임 연설을 통해 "대처 수상에게 오랫동안 충성을 바쳤지만 이런 일을 겪게 됐다"며 "다른 의원들도 나와 비슷한 처지가 되지 않을 지 고민해보라"고 했다. 옛 동지 사이에 벌어진 배신과 응징, 복수의 '막장 드라마'였다.

수상의 최측근이었던 인물의 이 같은 연설에 보수당은 충격에 휩싸였다. 대처의 리더십은 치명상을 입었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대처 수상과 갈등을 빚고 국방장관에서 사퇴했던 마이클 헤젤타인이 대처에게 맞서 당권에 도전했다. 당수 경선에서 현직 당수인 대처는 1위를 차지했지만, '2등과 15%포인트 이상의 차이가 나야 한다'는 승리 요건을 채우지 못했다. 45%의 의원들이 대처로부터 등을 돌렸다. 2차 투표를 앞두고 대처는 경선 불참을 선언했다. 패배 가능성이 높다고 봐서다.

그렇게 대처는 15년 동안 유지한 보수당수, 약 12년 간 지켜온 영국 수상 자리에서 물러났다. 대처의 후계자로서 2차 투표에 나선 메이저가 새로운 보수당수이자 영국 수상에 올랐다. 영국 정당정치가 본격화된 19세기 중반 이후 3차례 총선에서 내리 승리하며 12년 연속 수상을 지낸 인물은 대처가 유일하다. 강력한 리더십으로 노동개혁과 복지개혁을 이끌며 이른바 '영국병'을 치유하고, 대외적으론 '위대한 대영제국'을 부활시킨 대처였지만 결국은 최측근과의 갈등으로 정치적 최후를 맞았다.

대처는 엘리자베스 1세와 함께 박근혜 대통령이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다. 대중의 인기에 휘둘리지 않는 소신의 리더십을 특히 좋아한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2002년 한국미래연합 대표 시절 영국을 방문했을 당시 대처를 찾아가려 했지만 대처의 건강 문제로 만남이 불발됐다. 취임 전 삼성동 자택의 서재에는 대처의 저서 '국가경영'이 꽂혀 있었다. 둘 사이에 닮은 점도 많다. 우선 최초의 여성 수상, 여성 대통령이다. 이공계 출신이고 50대 초반 보수정당의 대표 자리에 올랐다. 단호한 리더십 스타일도 닮아있다.

박 대통령의 7일 대구 방문에 대구지역 의원들이 초대받지 못한 것을 놓고 설왕설래가 이어지고 있다. 대구와 달리 9일 인천 방문에는 인천지역 의원들을 초청한 게 논란에 불을 지폈다. 박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다가 갈등을 빚고 여당 원내대표 직에서 물러난 유승민 의원과 관련 짓는 해석도 나온다. 대구의원 상당수가 유 의원을 도왔음을 고려했다는 얘기다. 심지어 청와대 참모진을 앞세운 '대구의원 물갈이'설까지 흘러나온다.

"'배신의 정치'는 (중략) 반드시 선거에서 국민들께서 심판해 주셔야 할 것"(6월25일 국무회의)라는 박 대통령의 발언이 새삼 주목되는 건 이런 배경에서다. 유 의원도 자신을 도왔던 대구의원들이 자신 때문에 공천에서 불이익을 보는 것을 그냥 두고만 볼 수는 없을 터다. 응징과 복수의 역사가 우리 정치에선 재연되지 않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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