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에 취한 대통령, 우울증에 걸린 대통령

[the300] [이상배의 이슈 인사이트] 마약 상습복용한 英 이든 수상·美 케네디 대통령…건강 문제, '직무유기' 면죄부 안돼

이상배 기자 l 2016.12.19 05:55


# 1956년 당시 앤소니 이든 영국 수상은 쓸개관(담관) 궤양을 앓고 있었다. 복부전염이 겹치며 체온이 41도까지 오르기도 했다. 통증이 워낙 심해 마약성 각성제인 '암페타민'을 달고 살았다. 수상 재임 중 그는 줄곧 암페타민에 취해 있었고 심각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이 때문에 항상 변덕이 심했고 신경질적이었다. 그 와중에 수에즈 운하 사태에 따른 스트레스가 그의 병세를 악화시켰다. 

이집트의 군부 출신 지도자 압둘 나세르가 그해 7월 수에즈 운하를 전격 국유화했다. 수에즈 운하의 지분을 일부 소유하고 있던 영국으로선 방관할 수 없는 문제였다. 외교적 해결이 무산되자 집권 보수당에선 군사적 개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결국 이든 수상은 이집트 침공 작전을 승인했다. 같은 해 10월 영국군은 이스라엘·프랑스군과 함께 이집트를 공격했다.

그러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미국이 등을 돌리면서 영국군은 망신만 당한 채 이집트에서 퇴각해야 했다. 대영제국의 위신은 추락했다. 정치적 궁지에 몰린 이든 수상은 이듬해 1월 수상직에서 물러나 자메이카로 요양하러 떠났다. 수상 취임 20개월만이었다. 이든 수상의 치명적 오판은 암페타민에 따른 각성효과와 무관치 않다는 게 역사학계의 정설이다.


지도자의 건강은 때론 인류의 역사를 바꾼다. 나폴레옹이 복통으로 갑자기 쓰러지지만 않았어도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이겼을 것이란 얘기가 있다.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지독한 요통 때문에 마약성 마취제인 프로카인 주사를 맞고 코카인, LSD 등 마약에 취해 있지 않았더라도 1961년 쿠바 피그만 침공처럼 어처구니 없는 작전을 벌였을까?

박근혜 대통령의 자문의였던 김상만 전 녹십자아이메드 원장은 박 대통령이 취임 당시 부신피질기능저하증에 근접한 상태였다고 밝혔다. 지난 14일 국회 '최순실 게이트' 국정조사특별위원회 3차 청문회에서다. 박 대통령의 면역기능에 문제가 있었다고도 했다. '2급 국가기밀'에 해당하는 박 대통령의 건강문제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에디슨병'으로도 불리는 부신피질기능저하증은 무기력증, 우울증, 식욕부진, 근육쇠약, 구토, 발열 등을 수반한다. 급성일 경우 저혈압, 저혈당, 탈수, 전해질 이상, 쇼크 등으로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부신피질에서 분비되는 코르티솔, 알도스테론 등 스테로이드 호르몬 부족이 원인이다. 코르티솔은 스트레스에 대응해 신체를 안정시키고 방어능력을 유지해주는 호르몬이다. 코르티솔이 부족하면 스트레스를 견디는 힘이 약할 수 밖에 없다. 우린 스트레스에 취약한 대통령을 두고 있었던 셈이다.

박 대통령은 2013년 4월 북한의 개성공단 잠정폐쇄로 국민 7명이 억류돼 있던 당시 주변에 극심한 스트레스와 불면증을 호소했다. 사태가 해결된 뒤엔 "그때 상황은 다시 상상하기도 싫을 정도"라고 진저리를 쳤다. 박 대통령이 스트레스와 과로에 약하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장기간 해외 순방을 다녀오면 어김없이 몸살을 앓았다. 순방 직후 사흘 정도는 공식 일정 없이 쉬는 게 당연시됐다.

박 대통령이 받은 호르몬 치료도 부작용이 없지 않다. 인공 호르몬에 과다 노출돼 체내 호르몬 균형이 깨지면 우울증과 무기력증이 찾아온다. 인간은 '호르몬의 노예'란 말이 있다. 호르몬은 인간의 의사결정을 지배한다. 믿고 싶지 않겠지만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대통령의 호르몬은 국가적 수준의 문제다.

박 대통령의 우울증과 무기력증은 과연 '세월호 7시간'과 무관할까? 국민 400여명이 탄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침몰하는데도 7시간 동안 관저에서 나오지 않은 대통령을 정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건강 문제가 이를 정당화할 수 있을까?

건강 문제를 스스로 극복할 자신이 없다면 대통령 자리를 맡지 말았어야 했다. 모질 게 들릴지 몰라도 아프다는 이유로 연민하고 직무유기를 용인해 주기에 대통령 자리는 너무나 엄중하다. 건강이 대통령의 중요한 자격 가운데 하나인 이유다. 또 다른 비극을 막으려면 앞으로 대통령 후보 검증 항목에 '호르몬 수치'도 반드시 추가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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