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리'의 서청원…박근혜 구하기 다시 한번?

[the300-대한민국 국회의원 사용설명서]

김태은 기자 l 2014.07.01 08:04


↑그래픽=이승현 디자이너



<그는 → 박근혜와의 의리, 새누리당과의 의리는>

서청원의 '컴백'이 당권 도전으로 이어질 것이란 1년 전 추측은 현실이 됐다. 작년 10월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홍문종 당시 새누리당 사무총장이 그를 만났다. 홍문종 사무총장은 청와대와 조율을 마쳤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이후 자의든 타의든 그의 행보는 향후 당청 관계의 가장 강력한 '바로미터'가 됐다.
 
서청원 새누리당 의원은 '우정은 변치않을 때 아름답다'고 말한다. 박근혜 대통령을 위해 감옥까지 다녀온 그가 박 대통령의 성공을 뒷받침하는 것이 의리이자 우정이란 말이다.
 
박 대통령이 그에게 빚을 졌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서 의원은 박 대통령이 어려운 시절 '친박연대'의 총대를 앞장서 맸고 지난 2008년 총선 당시 '친박연대 공천헌금 사건'으로 형사처벌을 받았다. 국회 복귀는 그의 명예회복인 동시에 박 대통령이 그에게 진 빚을 청산하는 답례로 여겨졌다.
 여기까지가 그와 박 대통령 간의 사적인 '의리'였다면 당권 장악은 일종의 공적인 '의리'를 실천하기 위한 발판인 셈이다. '서청원-박근혜'의 의리를 당청관계의 '공적 의리'로 승화될 거라는 그의 '의리론'이 새누리당원들의 가슴에도 와 닿을 지는 14일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판가름 날 전망이다. 
 
[키워드 → 과거]
과거 없는 현재는 없다. 그의 과거는 박근혜 대통령과 '친박'계의 과거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차떼기당'의 오명을 벗으려 몸부리친 한나라당의 과거이기도 하다. 새누리당 어느 누구도 그의 과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당 대표에 도전하는 그의 현재는 새누리당의 과거를 딛고 있다.
 
현재의 서청원 의원을 있게 한 과거는 친박연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8대 총선을 앞두고 친박계 의원들이 대거 공천에서 탈락하자 한나라당을 탈당해 독자 노선을 걸었다. 지역구 당선자 6명을 포함해 총 14명의 당선자를 배출하는 위력을 과시했고 총선 후 탈당자 전원이 한나라당에 복당하면서 정치적 복권에 성공한다. 그러나 정작 친박연대의 대표를 맡았던 서 의원은 정치자금법 위반의 오명을 뒤집어 쓰며 음지에 머물러야 했다.
 
작년 화성갑 재보선 당선은 그를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낸 것과 동시에 과거 정치인에서 현재 정치인으로 호흡케 했다. 당선 직후 밝힌 소회에서도 이 같은 복잡한 심경이 묻어난다. 그는 "모든 꽃은 비에 젖고 바람에 흔들리며 핀다"면서 "인생도 마찬가지로 정치를 하면서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인으로서 사욕을 부리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순탄치만은 않았던 정치 여정을 떠올렸다.

[이 사람의 한마디 → '우정은 변치 않을 때 아름답다"]
 
2010년 12월 24일 가석방 출소 당시 의정부교도소 앞 기자회견.
서 의원 평전의 제목으로도 쓰인 이 발언에 대해 평전 저자는 "지지자들이 보여준 성원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자 '친박'이라는 인연으로 얽힌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신뢰의 표현"이라 풀이했다. 서 의원 스스로도 "항상 되새기는 말"이라고 강조한다. 박 대통령과의 끈끈한 인연을 부각시키기 위한 수사로 읽히기도 한다.
 
서 의원의 이 한마디와 늘 나란히 등장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한마디가 있다. 지난 2011년 12월 서 의원이 이끄는 모임 송년회에 박 대통령이 참석해 "의리가 없으면 인간도 아니다"라고 했던 일화가 두고두고 회자됐다.
 
이번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도 서 의원은 '의리'를 화두로 삼는 모습이다. 강력한 당권 경쟁자인 김무성 의원과의 대결구도 역시 박 대통령과의 관계를 주요 의제로 설정했다.
서 의원은 기자들과 만나 "신뢰를 바탕으로 전당대회에 출마했다"며 "과거와 미래가 아니라 의리냐 배신이냐(의 문제)"라고 말했다.
 
[요 주의! → 미래]
 
전당대회가 당의 미래를 향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차기 총선을 내다봐야 하는 새누리당 현역 의원들과 예비 후보들에게 당 대표를 선택하는 기준은 선거 승리가 1순위가 될 수밖에 없다.
집권여당으로서 대통령의 성공이 중요한 요소임은 분명하나 박근혜 정부 후반부에 치를 총선을 내다볼 때 박 대통령  이외의 '플러스 알파'를 제시해 줄 당 대표가 필요하다. 
특히 선거 때마다 당 쇄신과 새로운 인물, 세대 교체 등이 등장해왔던 것을 고려할 때 '서청원'이란 정치인이 주는 '올드'한 이미지와 두 번의 정치자금 비리 전력 등이 당원들의 선택을 머뭇거리게 할 수 있다.
김기춘 비서실장에 의해 당이 좌지우지된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팽배해지면서 수평적인 당청관계 구축에 대한 당내 목소리도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서 의원 역시 '책임대표'가 돼 당이 정부를 이끌어가도록 하겠다고 한다. 문제는 국회 복귀부터 당대표 도전까지 그가 김 실장과 실질적인 정치적 공생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보는 당 안팎의 시각이다. 
새누리당의 미래가 김 실장의 후퇴를 요구한다면 서 의원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그의 라이벌 → 김무성, 이재오]
 
*김무성 : 서청원 의원은 1985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에 참여하면서 김영삼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는다. 같은 해 김무성 의원 역시 민추협을 통해 정계에 입문, 두 사람 모두 상도동계에 정치적 뿌리를 두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나이로나 정치 경력으로나 서 의원이 김 의원을 한 수 아래로 여기고 있는 것이 사실. 서 의원은 일찍이 1981년 11대 총선에서 민주한국당 공천으로 서울 동작구에서 당선돼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지난해 재보선 출마를 앞두고 김 의원을 만난 자리에서는 "10년 전에 이미 당 대표를 했는데 너하고 당권 경쟁을 하겠나"며 안심시켰다. 김 의원과의 당권 경쟁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경쟁상대가 아니다"라는 말로 내심 '급이 다르다'는 점을 부각시키기도 했다.
 
*이재오 : 서청원 의원의 정치 명운을 가른 '친박연대'의 대척점에는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의 친이(친이명박)계가 있다. 18대 총선에서 친박계 의원들은 친이계에 의해 이른바 '공천학살'을 당했다. 서 의원도 여기에 포함됐다. 그가 탈당 후 '친박연대'란 독자 세력을 꾸리는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된 데는 친이계 좌장인 이 의원이 결정적 역할을 한 셈이다. 
 
상황은 180도 변했다. 새누리당 내에서 친이계는 명맥만 남았을 뿐 철저히 비주류가 됐다. 이재오 의원은 친박 틈새에서 대통령과 정부, 새누리당에 쓴소리를 던지며 존재감을 유지하고 있지만 비박(비박근혜)계의 구심점은 김무성 의원에게 내 준 상태다.
서 의원은 중앙대 선후배 사이인 이 의원과 50년지기 동지애로 화해의 손길을 내민 상태다. 국회 복귀 전 이 의원을 만나서 "현재 당에서 친박만 움직이고 친이는 숨죽이고 있는데 친이를 당 안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새누리당 내 친이계와 친박계 갈등이 불거지면서 두 사람 또한 충돌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올 초 개헌 필요성을 언급한 이 의원에 대해 서 의원이 "개헌보다는 경제"라며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의 사람들 → '친박'의 재구성]
 
스스로 친박계 맏형을 자처하는 친박 핵심이자 주류. '원조 친박' 김무성 의원을 '비박'으로 가지치기하는 등 친박계 분화를 주도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재보선부터 전당대회 출마까지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과의 관계가 언급되고 있어 친박의 구심점 역할에 대한 의구심이 따른다.
 
*김기춘 : YS계 정치적 동지이자 박근혜 대통령의 원로 자문그룹의 일원. 막역한 사이로 알려져있으며 서 의원의 국회 복귀와 당대표 도전에 핵심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철래·이우현 : 서청원계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원내에서 서 의원의 오른팔, 왼팔 역할을 자임한다. 이들은 친박연대 출신으로 서 의원의 정치적 고락을 함께했다.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서 의원을 주저없이 꼽을 정도로 개인적인 충성심도 높다.
 
*최경환 : 한 때 친박 핵심에서 당 대표로 서 의원이 아닌 최경환 새누리당 의원을 밀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면서 라이벌로 돌아설 뻔 한 관계. 그러나 3선의 한계에 서 의원의 의지에 가로막혀 경제부총리로 돌아선 후 친박 내 교통정리를 중재함.
 
*홍문종 : 사무총장으로서 서 의원의 국회 복귀를 표면에서 지원. 한 배를 탄 것으로 여려졌으나 최근 전당대회 출마로 관계가 복잡해졌다는 관측이 나옴. 겉으로는 서 의원과 친박 러닝메이트로 보이나 친박표에 대한 영향력이 어디로 튈 지 오리무중이란 지적도.
 
['서청원법'은 → 7선에 단 11건 '세월호특별법으로 만회할까]
 
11대 국회에서 처음 국회의원이 됐고 현역 최다선인 7선 의원이지만 그의 정치는 입법 활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서청원 의원이 대표발의한 법안은 단 11건이 검색된다. 25년 국회의원 생활 동안 2년에 한건 꼴로 법안을 발의했다는 얘기다. 그마저도 서 의원의 첫 법안은 2000년에 가서야 나온다.
 
그러나 '세월호 사고'라는 국가적 재난 앞에서는 서 의원도 변했다. 그는 세월호 사고의 진상을 규명하고 이 사건과 관련된 희생자와 그 유족들에 대한 보상과 배상, 책임자 처벌에 필요한 조치, 국가재난대비체계의 혁신방안을 제시하도록 하는 '세월호 특별법' 발의에 앞장섰다.
세월호 사고가 민심과 향후 국정운영에 미칠 영향에 대해 7선의 정치 감각이 발휘돼 탄생한 법안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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