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위원회' 2년…우원식의 '을지로 당' 재탄생 구상

[the300][대한민국 국회의원사용설명서]우원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박광범 기자 l 2015.06.23 08:39

그래픽=이승현 디자이너


2013년 6월 국회 본청 로텐더홀 바닥 한켠에 국회의원이 앉아있었다. 이른바 '남양유업 사태'로 갑의 횡포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됐던 때였다. 그는 '을(乙)의 눈물을 외면하지 말라'며 6일간 단식에 돌입했다.

단식의 주인공은 우원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우 의원은 같은 당 윤후덕 의원과 함께 '을지키기 법안' 통과를 촉구하며 단식을 벌였다. 당시 국정원 대선개입 파문으로 갑을문제가 수면 아래로 갈아 앉는 상황에서 택한 강수였다. 단식으로 5kg의 살이 빠졌다.

우 의원은 당시 당 '을지로위원회'를 대표해 단식을 했다. 2013년 출범한 새정치연합의 을지로위원회 아이디어는 온전히 우 의원의 구상이었다. 우 의원은 남양유업 사태가 불거졌을 당시 우리사회 수많은 '을'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위원회를 만들어야겠단 생각을 했고, 당 최고위가 동의했다.

우 의원은 위원회 이름을 두고 며칠을 보좌진과 머리를 맞댔다. 갑을문제가 최대 화두였던 만큼, '을'자로 시작하는 모든 단어들을 조합했다. 당시 후보군에는 '을지문덕위원회'도 있었다는 후문이다. '을을 위한 길', '을을 위한 법(law)' 등 중의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 을지로위원회가 어느덧 출범 2년을 맞았다. 2년간 많은 성과를 이뤘지만, 한계도 있었다. 을들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던 을지로위원회가 오히려 기업들에 갑질을 한단 비난에 시달려야 했고, 현장을 통한 문제 해결을 강조하는 위원회 특성상 입법 성과가 부진하단 지적도 있다.

을지로위원회가 당과 겉돈다는 느낌도 없지 않다. "을이 대부분인 국민들을 위한 정당 조직이 아니다. 당을 개혁하겠다는 말은 많지만, 제대로 된 민생정당을 만들겠다는 고민은 부족한 것 같다"는 게 우 의원의 판단이다. 그는 당이 명실상부 '을지로당'으로 거듭나야한다고 주장한다.

새정치민주연합 을지로위원회 출범 2년을 맞은 지난 5월1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우원식 위원장이 소회를 밝히고 있다./사진=뉴스1제공


[키워드]①현장
우 의원은 유독 '현장'을 강조한다. 을지로위원회도 기존 정치권의 위원회와는 성격이 다르다. 기존 정치권의 문제해결 방식이 아니라 을의 문제를 직접 듣고 해결하기 위해 현장을 직접 방문한다. 그렇다고 사측을 일방적으로 겁박하는 것은 아니었다. 노사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는 게 1차 목표였다. 노사 협상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그 결과를 수용하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10여 년 전 노무현을 찍었던 사람들이 2012년에는 박근혜를 찍고, 월수입 200만원 이하의 서민들이 당에 등을 돌린 것이 그가 진단한 당의 근본 위기다. 위기 극복의 해법으로 우 의원이 제시하는 것 역시 '현장'이다.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이라고 외치면서도 정작 정권을 잡고 나선 서민들의 고통을 함께 헤아리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지난 18대 총선에서 낙선했던 경험도 중요한 자산이 됐다. 그는 "18대에 낙선하면서 현장을 훨씬 더 많이 알게 됐다. 동네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국가정책이 뭐가 잘못됐는지가 보인다"며 "정책의 잘잘못을 중앙에서만 봐서는 안되고 동네에서 봐야 훨씬 더 자세히 알 수가 있다. '현장에 답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5대강 도보 순례'가 그의 '현장 중심 의정활동'의 대표적인 예다. 그는 17대였던 2005년 섬진강(212km, 섬진강 은어의 꿈) △2006년 금강(396km, 비단내 금강을 아름답게) △2007년 한강(482km, 생명과 평화가 흐르는 한강) △2008년 낙동강(522km, 생명·평화·공생) △2013년 영산강(136km, 영산강 생명의 강으로) 순으로 도보순례를 했다.

도보 순례를 처음 시작할 당시 일부 환경단체 사람들은 "진짜 다 걷는거냐", "첫날만 걷고, 마지막 날 걷고서 같이 사진이나 찍으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일부 지역 환경단체에선 같이 도보순례에 참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 의원이 진짜로 다 걷는지 감시하기 위해 도보순례에 참여하기도 했다.

섬진강을 걸었을 때의 일이다. 8박9일간의 도보순례를 하다 보니 끼니는 거리에서 라면으로 때우고, 노숙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루는 숙소로 마을회관을 정했는데, 밀짚모자를 쓰고 반바지를 입은, 수염은 덥수룩한 사람이 국회의원이라고 하자 마을 주민들이 신기했던지 마을회관으로 몰려들었다. 밤이 깊도록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왁자지껄 즐거운 술자리를 즐겼다.

그는 5대강 도보 순례를 통해 국회의원이라는 '도구'가 현장에서 생각보다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지역 주민과 지자체, 환경단체간 해묵은 갈등을 풀어주기도 했고, 현장에서 보고 들은 문제의 제도개선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환경단체 사람들도 도보순례를 마칠 때는 그에 대한 불신을 거뒀다. 정치가 불신 받고 외면 받는 시대라고 하지만, 우 의원은 모든 삶이 정치와 연결되어 있고, 정치가 우리 삶의 대부분을 결정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얻은 결론. "그래도, 정치는 희망이다"

[키워드]②이산가족-"60년 전 헤어진 누나가 살아 있다"
우 의원은 9남매 중 막내다. 우 의원이 태어나기 전인 6·25 전쟁 당시 6남매를 기르셨던 우 의원의 부모님은 생계를 위해 11살 정혜양, 8살 덕혜양을 아버지의 고향이었던 황해도 연백으로 보냈다. 그게 60년이 넘는 이별이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북한에 있던 두 누님 중 큰 누님인 정혜 누님이 남한의 가족을 찾는다고 들은 것은 2010년 10월이었다. 이산가족 찾기를 시작한 1980년대부터 북쪽의 누님들을 만날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국민의정부, 참여정부 때도 그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우 의원은 남북관계가 경색됐던 이명박정부에서 북측의 누님을 볼 수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우 의원은 당시 94세였던 어머니를 모시고 '목숨을 건 금강산 여행'을 떠났다. 이산가족상봉에선 정혜 누님만 만날 수 있었다. 신청인만 상봉할 수 있단 규정 탓에 덕혜 누님은 보지 못한 것.

우 의원은 짧았던 2박3일의 상봉을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에서 두 손을 포개고 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어머니의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기쁨과 이별의 고통, 안타까움이 모두 얽힌 무표정이었다고 했다.

우원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사진=이동훈 기자


[프로필]
"대학 1학년 때에요. 써클에서 여름에는 농활을, 겨울에는 도시빈민봉사를 갔어요. '사람들이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왜 이렇게 못 살까' 그게 제 출발이었어요."

우 의원이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독재정권 때문이었다. 정부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재벌들과 결탁하고, 아무리 일해도 어려운 사람들이 생겨나는 근본 이유에 독재 권력이 있다고 봤다. 그가 반독재운동에 뛰어든 이유다.

우 의원은 연세대학교 재학 시절인 1978년 박정희 전 대통령 퇴진 운동을 하다 '우선징집' 대상으로 분류돼 군대로 끌려갔다.

육군 병장으로 만기제대를 하고 사회로 돌아왔지만 세상은 그대로였다. 1981년엔 전두환 전 대통령 퇴진운동을 펼치다 체포돼 3년형을 선고 받고,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우 의원이 독립운동가의 외손자임을 안 것도 이때였다. 당시 우 의원을 면회 온 이모는 우 의원을 보자마자 "원식아! 잘했다. 자랑스럽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 의원의 외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 '김한' 선생이라고 설명을 해줬다. 세월이 흘러 2005년 광복절. 우 의원의 어머니는 노무현 전 대통령으로부터 김한 선생에 대한 독립유공 훈장을 대신 받기도 했다.

우 의원이 현실정치에 뛰어든 것은 1988년 1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선에서 낙선하고 평화민주당을 만들었을 때다. 김 전 대통령이 2선으로 후퇴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 재야 활동가 100여명과 평민당에 입당했다.

김 전 대통령을 돕기 위해 당에 들어왔지만 정치권 내가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도 사회에 기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우 의원은 환경운동에 뛰어 들었다.

우 의원의 집이 있는 서울 노원 상계동의 당시 최대 이슈는 '쓰레기 소각장'문제였다. 쓰레기 소각장 반대투쟁은 1992년부터 시작됐고, 1995년이 돼서야 협약서를 체결하고 문제를 해결했다. 쓰레기 소각장 반대투쟁을 한 사람 중 한 명이 서울시의회에 진출해야한다는 의견이 나왔고, 우 의원은 그렇게 시의회에 입성했다.

우 의원의 정치인생이 탄탄대로였던 것만은 아니다. 서울시의원에서 국회의원이 되기까지 9년이 걸렸다. 시의원 활동을 바탕으로 모범적인 지자체를 만들겠단 꿈을 갖고 구청장 경선에 뛰어 들었지만 두 번이나 중도 낙마했다. 그 사이 국회의원에도 도전했지만 공천을 받는 데 실패했다.

우 의원은 지난 2004년 17대 총선을 통해 국회에 첫 입성한다. '뉴타운 바람'이 불었던 18대에선 아깝게 낙선했지만 2012년 19대 초선에서 49.7%의 득표율을 기록, 국회에 재입성 했다.

△서울(1957) △경동고 △연세대 토목공학과 △서울시의회 의원(서울 노원을) △환경관리공단 관리이사 △열린우리당 원내부대표·사무부총장 △17·19대 국회의원(서울 노원을) △민주통합당 원내수석부대표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 △새정치민주연합 을지로위원회 위원장 △황교안 국무총리 후보자 인사청문특별위원회 야당 간사 △새정치민주연합 혁신위원

[이 한 장의 사진]

사진=우원식 의원실 제공


지난 2010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 당시 큰 누나 정혜씨를 만난 우 의원. 이날 우 의원은 태어나 처음으로 큰 누나에게 술을 따라줬다.


[대표법안]
*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제한법 개정안 : 우 의원이 17대 국회 입성 후 3번째로 발의한 법안으로, 2005년 국회를 통과했다. 국가 및 지자체의 장애인고용의무 적용제외 대상을 경찰·소방·국방 등 국민의 생명보호, 공공의 질서와 안정 유지 관련 직종으로 제한했다.

우 의원에겐 장애로 의대 진학을 포기했던 친척이 있다. 힘든 수술도 견뎠지만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대학 진학이 좌절된 후 힘들어하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부당한 차별을 받아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고, 개인적으로 이 개정안이 통과한 것을 가장 보람된 의정활동 중 하나로 꼽는다.

*전두환 추징법(범죄수익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법 개정안) : 2013년 '전두환 추징법'을 대표발의 했다. 이 법 통과로 발의 당시(5월) 5개월 앞으로 다가왔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추징금 환수시효를 2020년으로 연장됐다.

*초단시간근로자 보호3법 : 초단시간근로자 보호3법은 고용보험법 개정안, 근로기준법 개정안, 근로자퇴직급여부장법 개정안을 말하는 것으로, 초단시간근로자들에게 각각 △고용보험 가입 △유급휴일 및 연차유급휴가 부여 △퇴직금 지급 등을 보장하는 내용이다. 이들 개정안은 현재 소관 상임위인 환경노동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우 의원은 박근혜정부가 추진하는 '양질의 시간선택제 일자리' 정책의 성공을 위해서라도 초단시간근로자 보호3법 통과가 필수적이라고 본다. 현행법상 초단시간근로자는 4대 보험가입 및 퇴직금, 연차 휴가 지급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구직자들이 시간선택제 일자리를 선택하는데 망설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주위엔]
우 의원은 김근태 전 상임고문의 정파그룹인 민평련(민주평화국민연대)의 대표주자다. 우 의원은 김 전 고문을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이자 선배로 꼽는다. 우 의원은 김 전 고문에 대해 "권력에 대한 욕심이 아니라 진정성 때문에 정치를 한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김 전 고문의 부인인 인재근 의원은 우 의원에게 '형수'이기도 하다. 우 의원의 서울 노원을과 인접해있는 도봉갑을 지역구로 인 의원이 출마했을 당시, 우 의원은 인 의원의 선거운동을 응원가기도 했다.

'김근태 정치'가 100%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진정성 있는 정치를 했지만, 결과를 내지 못했다는 냉정한 평가도 나온다. '김근태 정신'은 본받되, '김근태 정치'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위사람들의 평이다.

우 의원의 최대 관심사는 '을지로위원회'다. 을지로위원회에 소속된 당 소속 국회의원만 45명. 이 중에서도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의원들은 약 10여 명이다. 환노위 동기이기도 한 은수미, 장하나 의원을 비롯해 진선미, 김기식, 남인순 의원 등은 우 의원이 을지로위원회 활동을 하는 데 있어 든든한 버팀목이다.

당내 '86(80년대 학번·60년대생) 세력'과도 신뢰가 두텁다.

[요주의!!]
우 의원은 대표적인 강경파로 꼽힌다. 초선 시절이던 2004년 12월 국가보안법 연내폐지를 주장하며 240시간 의총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 "만약 불의와 타협하고 협상해야 온건파라면 그런 온건파는 절대 거부한다. 만약 불의와 왜곡에 대해 대화와 타협을 거부하는 것이 강경파라고 한다면 나는 강경파다"라고 말한다.

우 의원의 지역구는 서울 노원을(을). '을 지킴이'답게도 지역구도 '을'이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녹록지만은 않은 지역구다. 인근 노원갑·병이 비교적 야권 성향이 강한 반면, 노원을은 여권 성향이 강하기 떄문이다. '강북의 대치동'이라고 불리는 '중계동 학원가'도 노원을에 위치해 있다.

실제 우 의원은 17대 총선에서 당시 한나라당 권영진 후보(39.61%)를 단 1.9%포인트 차로 따돌리고 당선에 성공했다. 당시 같은 당 정봉주 전 의원(노원갑)이 12.11%포인트, 임채정 전 의원(노원병)이 8.24%포인트 차로 여유 있게 한나라당 후보를 제친 것과 대비된다. 우 의원은 재선에 성공한 19대 총선에서도 권영진 후보에 단 1.78%포인트 앞섰을 뿐이었다.


그래픽=이승현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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