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비인 듯, 조조인 듯'…문희상의 '무신불립'

[the300][국회의원사용설명서 2.0]문희상 더불어민주당 의원

김세관 기자 l 2016.06.13 05:50


'무신불립(無信不立)'과 '화이부동(和而不同)'.

'논어(論語)'에 담겨 있는 구절로 '개인이든 정치든 믿음이 없으면 삶과 국가 모두 존립하기 어렵고(무신불립)', '남들과 화목하게 지내더라도 원칙은 잃지 않아야 한다(화이부동)'는 의미의 성어다.

1992년부터 여섯 번의 국회의원과 한 번의 당의장(당대표), 두 번의 비상대책위원회위원장을 역임한 '정치9단' 문희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삶과 정치 인생 모두에서 지키고자 하는 좌우명이기도 하다.

문 의원은 정치를 하는 동안 두 명의 대통령(고 김대중 전 대통령,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의해 각각 청와대 정무수석과 대통령 비서실장 등 가볍지 않은 자리에 임명되는 영광을 누렸다. 또 당은 비상시국을 책임져 달라(비대위원장)는 막중한 임무도 두 번이나 맡겼다. 좌우명처럼 확고한 믿음과 친화력, 그러면서도 원칙이 녹아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금수저'에서 '빨갱이'로, '野 의원'으로]

문 의원은 1945년 3월 의정부에서 태어났다. 철도직 말단 공무원이었지만 대지주였던 부친의 2남3녀 중 맏이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금수저'였다. 아버지는 숨을 거두면서 자녀들에게 적지 않은 재산을 물려줬다.

그러나 문 의원은 재산을 물려받은 지 10년도 안 돼 마이너스 재산 보유자가 됐다. 돈이 아닌 다른 것에 가치를 둔 인생을 산 탓이다. 학창시절은 양주국민학교(현 의정부중앙초등학교)에서 시작했다. 이후 경복중학교와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젊은 나이에 학교법인 경해학원의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정작 그의 관심은 민주화 운동에 있었다. 실향민이 많아 반공정서가 높은 의정부에서 문 의원은 '빨갱이' 소리까지 들었다. 부모 속을 어지간히도 태웠다. 그러던 중 1992년 14대 총선에서 의정부에 민주당 후보로 나서 처음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5대에 낙선했지만 16대부터 20대 까지 5번의 총선에서 모두 승리했다.

[친DJ, 그리고 친노]

문 의원은 고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발탁돼 정치에 입문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으로부터도 부름을 받아 국정운영을 도왔다. 친DJ계이면서 친노계라는 타이틀이 동시에 붙는 배경이다.

김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1979년 동교동 지하서재에서였다. 당시 문 의원은 행정고시에 합격했지만 민주화 운동 등의 이력으로 임용을 받지 못했다. 당분간 낭인생활이나 해야겠다며 독서와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던 차에 김 전 대통령과 조우했다.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고, 말 한 마디도 신중하게 하며, 원칙과 소신을 버리지 않는 모습을 보고 김 전 대통령을 따랐다. 김 전 대통령도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문 의원에게 요직을 맡기며 신뢰를 보였다.

문 의원은 참여정부 때도 승승장구 했다. 2002년 대통령 선거 당시 노무현 후보의 대선기획단장을 맡았고 참여정부 출범과 동시에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에 선임됐다.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를 관통한 그의 이런 정치 이력은 다양한 정치 계파가 충돌하고 있는 더민주에서 두번씩이나 비대위원장으로 난파선을 책임지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정권교체의 이름 '아버지']


문 의원에게 1997년 12월18일은 인생에서 가장 길고도 초조했던 시간이었다. 15대 대통령 선거일이기도 했던 그날,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으로 그는 마음 속의 짐이었던 '빨갱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버릴 수 있었다.

DJ의 당선이 확정된 새벽, 부친의 묘소로 먼저 달려갔던 것도 그래서다. 문 의원의 부친은 그가 초선 의원에 당선된 14대 총선 다음 날 쓰러졌다. 아들의 당선을 위해 발로 뛴 것도 모자라, 당선이 되고 의정부 시내 46개 경로당에 돼지고기와 술을 돌린 직후 집으로 돌아온 후의 일이었다. 그의 부친은 한 달 정도의 투병 생활 끝에 눈을 감았다. 아들의 당선을 위해 물심양면 몸을 던졌지만 부친은 야당의 길을 가는 아들을 끝까지 걱정했다. 문 의원은 "아버지는 나의 선택을 존중하고 선거 때마다 노인정을 찾아 지지를 호소하는 등 많은 노력을 하셨지만 돌아가신 그 순간까지 '야당의 가시밭길'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정권교체를 이룬 그 날에서야 '대성통곡'과 함께 비로소 부친의 걱정을 덜어낼 수 있었던 셈이다.

[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

문 의원은 다른 정치인은 한 번도 하기 힘든 비대위원장을 19대 국회 한 회기에 두 번이나 한 진기록을 보유했다. 2012년 대선 패배 후와 2014년 계파갈등으로 당의 리더십이 조각났을 때다. 그는 잦은 비대위원장 호출에 "내 몸이 비대해서 그런 것 같다"고 웃지만, 웬만한 사람으로 해결이 힘들 때 당은 그를 찾았다.

문 의원의 정치적 내공은 그가 가진 별명에서 그대로 묻어난다. 그의 별명은 '겉은 장비(張飛), 속은 조조(曹操)'다. 삼국지에 나오는 '장비'를 닮은 후덕한 외모지만 오랜 정치 역정을 통한 정국 해법 능력은 '조조'에 비견해도 뒤지지 않아서다. 두 번의 비대위원장 시절에 대한 평가도 나쁘지 않다. 차기 전당대회를 통해 당 대표가 선출될 때까지 흔들리지 않고 당을 이끌었다. '무신불립'의 좌우명과 계파를 초월한 정치이력으로 위기 극복의 초석을 닦은 것이다. 

[이 한 장의 사진]
맨 왼쪽이 문희상 의원. 사진=문희상 의원실 제공.

문 의원이 대학교 1학년이던 1964년 어느 봄날 늦은 오후, 법대 동기들과 함께 서울대 의해 함춘원 히포크라테스 동상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문 의원을 비롯한 친구들은 이 날의 모임을 '함춘원결의'라고 불렀다. "여기서 한 우리의 맹세는 평생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일신의 안위나 영달을 꾀하고자 하는게 아니라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이 날의 젊은 민족주의자들이 한 다짐이었다. '함춘원결의'가 훗날 전개되는 서울 법대 학생운동의 폭발적인 에너지원이 됐다고 문 의원은 설명했다.

[요 주의]


더민주를 대표하는 6선의 정치인이지만 최근 들어 신경이 쓰여 지는 일들이나 구설수 등에 종종 휘말리고 있는 점이 아쉽다.

문 의원 본인은 사실무근이라는 입장이지만 '취업청탁 의혹'을 불러일으킨 처남과의 송사가 여전히 진행 중이고 지난 20대 총선에서 쇄신과 물갈이라는 이유로 공천 '컷오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다시 공천을 받아 6선에 성공했지만 9일 치러진 야당 몫의 국회의장 선출을 위한 경선에서는 후배인 정세균 의원에게 고배를 마셨다.

[프로필]

△1945년 경기도 의정부 출생 △경복고 △서울대 법학과 △학교법인 경해학원 이사장 △청와대 정무수석 △국정원 기획조정실장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장 △열린우리당 당의장 △민주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 △새정치민주연합 비상대책위원장 △14·16~20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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