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두면 담 넘던 운동권 딸, 헌정 첫 女 예결위원장으로

[the300][의원사용설명서 2.0]김현미 국회 예산결산특위 위원장

우경희 기자 l 2016.09.21 05:40

편집자주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의 의정활동과 관심사, 경력을 입체적으로 분석해 드립니다. 의원의 경쟁력과 정치적 미래, 뿐만 아니라 국민의 '심부름꾼'을 어떻게 '사용'해야 우리 사회가 한걸음 나아가고 우리의 삶이 업그레이드 될 수 있을지, 분야별 '파워분석'을 통해 보여드립니다.



"데모쟁이 딸은 싫다!"

아버지가 집에 가두면 슬리퍼 차림으로 담을 넘던 운동권 대학생 딸. 7녀1남 중 둘째인 딸은 노동운동을 하다가 1987년 평화민주당에 입당, 정치에 본격 투신했다. 대졸 출신 여성 1호 당직자인 그를 김대중 평민당 대통령후보가 곁에 뒀다. 헌정사 첫 여성 국회 예산결산특위 위원장 김현미(3선·더불어민주당·경기 고양시정)의 정치 입문기다. 

말단 당직으로 시작한 김 위원장은 어느새 30년 내공의 3선 국회의원이 됐다.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국내언론비서관과 정무2비서관을 거치고, 문재인 당 대표의 비서실장으로 일한 것은 정치인 김현미를 말할때 빼놓을 수 없는 이력이다. 그러면서도 계파를 분류할땐 언론을 고민하게 만든다. 30년간 당의 일을 도맡으면서 맞닿지 않은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김현미 예결위원장 2015.9.18/뉴스1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저격수에서 '강줌마'로=DJ가 첫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던 1997년. 김현미 위원장(당시 새정치국민회의 TV모니터 팀장)은 초시계를 끼고 살았다. 공중파 3사만 있던 시기, 방송모니터링 자체가 생소한 개념이었다. 김 위원장은 방송국 당 2명의 팀원을 배치하고 모든 뉴스와 정치관련 콘텐츠를 녹화하며 체크했다. 

"오늘 뉴스에 여당 대표는 40초 노출됐는데 우리 총재(DJ)는 12초밖에 노출이 안됐어요. 카메라 각도 탓에 우리 인원도 훨씬 적어보이잖아요!"

방송 분량과 내용의 공정성에 관련한 항의가 매일 계속됐다. 방송사 담당 직원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정당의 첫 언론모니터링 교본이 탄생했다. 같은 해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뤄지면서 김 위원장의 초시계 교본은 지금도 성공사례로 회자된다. 

17대 국회 비례대표 초선때도 깐깐함은 여전했다. 2007년 대선에서 정봉주, 박영선 의원과 함께 대통합민주신당 BBK 진상조사팀으로 활동하면서 저격수 3인방으로 불렸다. 2008년 18대 총선에선 낙선의 고배를 마신 후 당시 한나라당으로부터 10건이 넘는 고소고발을 당했다. 법원과 검찰을 내집처럼 드나들었다. 

낙선의 시련은 혹독했다. 전체 고발건수 중 3건이 검찰에 기소됐고 그 중 2건은 무죄가 선고됐지만 한 건이 끝까지 발목을 잡았다. 김윤옥 여사의 시계가 1500만원대라고 폭로한 것이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이어져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곧바로 광복절 특사에 포함돼 다시 정치 활동을 재개한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김 위원장은 "시련이 나를 더 강하게 했다"고 회고한다. 시련의 시기가 지역구에 더 천착하는 계기가 됐다. 그는 입버릇처럼 "나를 다시 세워준 것은 일산 봉제공장의 언니들"이라고 한다. 당시 봉제공장 직원들, 하루 종일 서서 근무하는 대형마트 직원들, 식당 직원들과 부대끼며 사람 사이로 더욱 파고들었다. 

저격수에서 '강줌마(강한 아줌마)'로 이미지가 바뀐것도 이 때였다. 골목을 누비며 지역구 주민들을 만나고 민원을 해결했다. 일산 시장 상인들과 가정사를 묻는 것은 예사였다. 결국 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김영선 후보에 설욕하며 국회에 다시 입성했다. 

1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김현미 예결위원장이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이날 예결위를 통과한 추경은 본회의가 정세균 국회의장의 개회사에 대한 여당 의원들의 반발로 파행 돼 또 다시 통과되지 못하고 있다. 2016.9.1/뉴스1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원정출산·수첩공주' 만든 여의도 카피라이터=김 위원장은 최장수 부대변인을 지내며 단련된 기자 뺨치는 논평과 어휘 선택으로 늘 화제를 모았다. 

2002년 16대 대선때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며느리가 하와이에서 출산한 것을 두고 '원정출산'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대통합민주신당 부대변인 시절이다. 이는 지금도 자녀 국적을 위해 해외서 출산하는 관행을 지적하는 말로 일반적으로 쓰인다. 

당시 이 후보가 시장에서 씻지 않은 오이를 먹은 것이 서민행보로 회자되자 "서민들은 오이를 씻어 먹는다"는 짧은 논평으로 일축하기도 했다. 수첩을 끼고 사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2004년에 '수첩공주'라는 별명을 붙인 것도 김 위원장이다. 

스스로는 부대변인으로 일하며 쓴 첫 논평을 가장 애착이 가는 글로 꼽는다.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의 비리 문제가 불거지자 한나라당이 "야당 탄압"이라고 주장했다. 김 위원장은 아래 논평으로 반박, 정치권과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신선하게 데뷔했다. 

"말 한마디 하면 잡아가고 고문하고 죽이고 감시하고 연금했다. 수십년간 눌려살던 사람들이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을 때, 그 마지막 비명이 "야당 탄압하지 마라!"였다. 너희가 야당 탄압을 아느냐? 수십년 서럽게 살아온 야당의 수난사를 모욕하지 말라."('너희가 야당 탄압을 아느냐'·1998년)

오른쪽 사진 해공 신익희 동상 뒷편으로 제헌의회 부조가 보인다./사진=머니투데이DB


◇제헌국회의원 후손의 '할부심(할아버지+자부심)'=김 위원장은 지금도 국회의사당 로텐더홀을 지날때면 발을 멈춘다. 로텐더홀 벽에는 1948년 5.10 총선거에서 선출된 제헌국회의원 199명(사무총장 포함)의 부조가 새겨져 있다. 김 위원장의 조부는 제헌의원인 고 김종문 의원이다. 제헌의원의 후손 중 현역 국회의원은 김 위원장이 유일하다. 

조부는 보성전문 상과 3년을 중퇴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정읍을에서 초대 의원(한국민주당)에 당선돼 제헌헌법 제정에 기여했다. 하지만 한국전쟁 발발 당시 40대의 젊은 나이로 작고한다. 김 위원장의 부친 고 김병태 전 정읍시의회 의장은 훗날 김 위원장의 당선을 누구보다 기뻐했다. 

김 위원장은 "사진으로는 손에 잡히지 않던 할아버지의 모습을 부조로 처음 대했을 때 너무나 깊은 감상에 사로잡혔던 생각이 난다"며 "지금도 본회의장에 들어갈 때면 마음 속으로 할아버지에게 조언을 구하곤 한다"고 말했다.  

◇정책경쟁·서민예산…중도 예결위원장 꿈꾼다=김 위원장은 우리 경제를 위기상황으로 진단했다. 그는 "소득 양극화, 저출산 고령화, 1000조원을 넘어선 가계부채를 보면 우리 경제는 위기상황이 분명하다"며 "부자감세로 대기업 사내유보금은 쌓여 가는데, 직장인 세부담은 늘어나고 가계 살림은 더 힘들어졌다"고 지적했다. 

20대 국회 첫 예결위원장인 그가 서민들의 주머니를 채울 수 있는 예산편성을 첫 손 꼽는 것은 이 때문이다. 김 위원장은 "정치는 이제 누가 더 좋은 정책을 가졌는지, 정책으로 경쟁해야 할 때가 왔다"며 "더불어민주당이 무너진 중산층을 복원하고 서민들의 주머니를 채울 수 있는 소득주도형 성장정책을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계파를 꼽을땐 항상 언론을 고민하게 만든다. 노무현 정부 핵심으로 활동했지만 친문(친문재인)으로 단순 분류되기는 거부한다. 2007년에는 정동영 대선후보 선대위에서 대변인을 지내며 정동영계와도 비중있게 교유했다. '86운동권'(80년대 운동권 출신)으로 분류하는 시각도 많다. 

당내 친소관계도 폭넓다. 김 위원장의 웨딩카를 몰아준 오랜 절친 선배인 우원식 의원은 비문(비문재인)계로 분류된다. 함께 대변인실 생활을 오래 한 친구 유은혜 의원은 범친문으로 분류되긴 하지만 민평련 소속으로 당내서는 캐스팅보트에 가깝다. 

스스로도 계파에 휩쓸리지 않는 중도의 역할을 다짐했다. 그는 "그 동안은 행동대장형에 가까웠지만 이제 당의 정책을 결정하고 홍보와 전략을 짜는 당직을 많이 맡아오고 있다"며 "당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허리 역할이 필요한데, 내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1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예결위 결산심사소위원회에서 주광덕 위원장이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왼쪽은 결산심사소위에 방문한 김현미 예결위원장. 2017.7.18/뉴스1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하나의 법안]미소금융의 어머니='미소금융'이라 불리는 최초의 서민소액대출은 지난 2007년 김 위원장이 발의한 '휴면예금관리재단 설립 등에 관하 법률'에 기인한다. 매년 은행이 흡수하던 수백억원의 휴면예금을 서민들을 지원하는 신용지원 재원으로 전환하는 내용이다. 이에 따라 그간 금융혜택을 받지 못하던 서민들의 대출길이 열렸다. 지난해 3월 기준 대출액은 1조738억원(8만8793건)에 달한다. 

◇[요주의]중도 외치지만..공허한 울림 될수도=더민주 내에서 86운동권 세력과 친문의 밀월관계는 이미 상식이다. 친문이 주류를 확보하고 있는 상황에서 김 위원장의 중도론이 선명성을 갖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김 위원장의 행보 자체가 주류에 매몰돼 해석되는 것도 사실이다. 

예결위원장 선출 과정이 대표적이다. 김 위원장이 원내대표직을 포기하면서 우상호 현 원내대표 등 친문 핵심 세력과의 전략적 연대가 작용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원내대표를 양보하는 대신 알짜배기 상임위원장 자리를 안배해 줬다는 거다. 

이런 상황에서 김 위원장이 중도로 자리매김하지 못한다면 친문패권에 대한 견제 1순위가 될 수 있다. 한 야당 관계자는 "운동권들이 운동할 동안 안철수는 V3를 만들어 나름 세상을 바꿔놓은 것인데, 이 가치를 포용하지 못한다면 더민주의 주류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며 "운동권 출신으로 탄탄대로를 달린 김 위원장이 경계해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사진=김현미 의원실 제공


◇[이 한장의 사진①]=대선 이후인 1988년 마포당사 홍보위원회실에서 DJ와 당직자들이 찍은 사진. 당시 당보 기자로 말단에 섰던 김 위원장(DJ 오른쪽 첫 번째)을 DJ가 "김현미씨는 이리 오라"며 불러 곁에 세웠다. 김봉호 전 국회부의장(이하 김 위원장 왼쪽 두 번째), 김경재 자유총연맹 총재(세 번째),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네 번째) 한화갑 한반도평화재단 총재(전체의 오른쪽 두 번째) 등 원로들의 모습도 보인다. 김 위원장은 "홍보부위원장이던 김경재 총재가 "왜 이리 총재님(DJ)을 허물없이 대하느냐"고 질책할때면 "저라도 그래야 웃으실 일이 있죠"라고 받아치곤 했다"고 말했다. 

/사진=머니투데이DB


◇[이 한장의 사진②]=2014년 세월호 국정조사 특위 간사를 맡았던 김 위원장. 국회 정론관에서 국조특위 기관업무보고 시기와 관련한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지자 "바닥에 앉아 올려다보면서 받아치려면 목이 아프지 않느냐"며 바닥에 쪼그려앉아 브리핑했다. 

[프로필]
Δ전북 정읍 출생 Δ전주여고 Δ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Δ새정치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 부대변인 Δ참여정부 국내언론비서관 Δ참여정부 정무2비서관 Δ열린우리당 대변인 Δ19대 국회 전반기 기획재정위원회 야당 간사 Δ새정치민주연합 전략홍보본부장·을지로위원회 부위원장·대표비서실장 Δ국회 세월호 침몰 진상규명 국정조사특별위원회 야당 간사 Δ20대 국회 예결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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