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치리포트]부마항쟁 40주년, 첫 국가기념일 文참석

[the300]박정희 유신체제 종식, '전두환, 진압 지휘' 기록도 확인

김성휘 기자,최태범 기자 l 2019.10.17 10:32
부마항쟁 일지/그래픽=이승현 디자인기자

①文정부, 올해 국가기념일 지정 '재평가'

문재인 대통령이 16일 창원 경남대 운동장에서 열린 제40주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에서 "모든 권력기관은 조직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민주주의의 상식을 명심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부마항쟁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후 처음 갖는 정부주최 기념식에 대통령으로는 최초 참석해 이같이 말했다.

문 대통령은 "유신독재의 가혹한 폭력으로 인권을 유린당한 피해자들 모두에게 대통령으로서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지난 10월에야 부마항쟁 관련 사망자로 공식 인정된 고 유치준씨에 대해선 "국가가 피해자들의 고통을 돌보지 못했던 시간이 너무 길었다"고 말했다.

또 "국회에 계류 중인 부마민주항쟁의 진상조사 기간 연장과 관련자 예우에 대한 법률 제·개정안의 조속한 통과를 위해서도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文정부 들어 재평가= 부마항쟁은 학생 외 직장인, 시민, 노동자들이 참여했다는 점에서 1987년 민주화운동의 원형이기도 하다. 계엄령에 따른 강제구인, 고문 등 인권유린도 벌어졌다. 정치권에선 그동안 부마항쟁이 저평가된 면이 있다. 문재인정부 들어 재평가가 속도를 냈다.

때마침 검찰개혁 이슈가 급부상했다. 계획한 것은 아니지만 절묘한 타이밍이다. 이에 문 대통령의 기념사 메시지가 보다 선명해졌다. 문 대통령은 부마항쟁에 대해 "민주주의의 새벽을 연 위대한 항쟁이었다"며 "부·마(부산·마산)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성지"라고 말했다.

이어 "4.19혁명, 부마민주항쟁, 5.18광주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과 2016년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민주항쟁의 위대한 역사가 있는 한, 어떤 권력도 국민 위에 군림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저는 지난해 발의한 개헌안에서 헌법전문에 4.19혁명에 이어 부마민주항쟁과 5.18광주민주화운동, 6.10항쟁의 민주이념 계승을 담고자 했다"며 "비록 개헌은 좌절되었지만 그 뜻은 계속 살려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최근 광화문을 문 대통령 반대 목소리가 채웠지만 그것 또한 국민의 의견으로 인정한다는 게 '부마'의 경험 덕이다. 광장에서 표출되는 민심이 얼마나 강력한지, 따라서 권력 그 자체든 권력기관이든 국민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점을 문 대통령은 40년 전부터 체감했다. 

【서울=뉴시스】 박영태 기자 = 문재인 대통령이 16일 오후 청와대 여민관 소회의실에서 법무부 현안 보고를 받기 전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2019.10.16.(사진=청와대 제공) photo@newsis.com

◇檢 개혁 강조..법무부차관 면담= 문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통해 많은 국민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갖게 되었다"며 "각자의 목소리를 분출하며 민주주의는 더 다양해지고, 자신의 목소리가 중요한 만큼 다른 이들의 목소리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지금 국민은 더 많은 민주주의와 더 좋은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다"며 "민주주의는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실천하는 가운데 확장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언제나 행동으로 민주주의를 살려온 국민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며 "이제 우리의 민주주의가 양보하고 나누며, 상생하고 통합하는 더욱 성숙한 민주주의로 발전하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이어 "평범한 사람들이 진정으로 나라의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 국가적 성취가 국민의 생활로 완성되는 민주주의를 향해 국민과 함께 나아가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부산의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 지정, 창원의 수소산업 특별시 선포, 경남 무인선박 규제자유특구 지정 등을 환영하고 지역경제 발전도 돕겠다고 말했다. 부마항쟁 의미부여는 정치적 해석도 따른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40년이나 지난 PK(부산경남)의 '야성'을 자극, 지지층 결집을 시도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마의 경험에서 출발한 문 대통령의 구상은 정치적 유불리보다는 큰 그림에 가까워 보인다.

문 대통령은 한편 창원에서 청와대로 돌아온 후 김오수 법무부 차관, 이성윤 법무부 검찰국장을 면담하고 검찰개혁안 진전 상황을 논의했다.


②文대통령, '전두환, 진압 지휘' 언급된 軍기록 확인

부마항쟁(1979) 관련 군 수사기록이 16일 창원 경남대 본관 특별전시에 걸려 있다./사진=청와대 제공

문재인 대통령은 16일 경남 창원을 방문한 자리에서 1979년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부마항쟁 진압을 지휘한 정황이 담긴 자료를 봤다. 이어 부마항쟁 기념식에서 국가폭력의 책임소재를 규명하겠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경남대 운동장서 열린 제40주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에 참석하기 전 대학본관에서 특별전시를 관람했다. 항쟁 당시 제작, 배포된 선언문 3종과 사진 자료 등이다. 부산MBC에서 발굴한 군 수사 자료도 있었다.

1981년 발간된 이 자료에는 1979년 10월18일 낮 12시20분경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부산에 와 부마민주항쟁 진압작전 회의에 참석한 기록이 나와 있다. 또 ‘초기 진압작전이 가장 중요‘하며 ‘군이 개입한 이상 데모자에게 강력한 수단을 사용해 데모 확산을 방지해야 한다’고 강조한 대목이 보인다.

이명곤 부마민주항쟁 기념재단 상임이사는 “실제 이 회의 직후인 오후 1시30분께 공수여단과 해병대 등이 부산에서 무력 진압에 나섰다”고 말했다. 청와대는 이 자료가 나왔다는 사실과 문 대통령이 해당 전시를 관람했다는 내용을 서면 브리핑에서 밝혔다.

문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정부는 부마민주항쟁의 진상규명과 피해자들의 명예회복, 보상에 더욱 힘을 쏟을 것"이라며 "국가폭력 가해자들의 책임 소재도 철저히 규명하겠다"고 말했다. 책임규명에 대해서는 "이제 와서 문책하자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정의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부마항쟁이 일어난 때 경희대 법대 제적생으로 사법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10·26 박정희 대통령 사망과 1980년 '서울의 봄' 정국이 이어지며 문 대통령은 복학생이 됐다. 학생운동에도 '복귀'했고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했다. 

부마항쟁 초기인 1979년 10월15일 부산대 민주투쟁선언문 원본/사진=청와대 제공

문 대통령은 부마항쟁 3년후 1982년부터 변호사로 고향인 부산에서 활동했다. 부마항쟁 참여자,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왔다. 이날 기념사에선 "저 자신도 부마민주항쟁 기념사업회에서 활동했고, 이곳 경남대 교정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기념식엔 송기인 신부, 배우 조진웅씨 등이 눈길을 끌었다. 송 신부는 문 대통령의 정치적 멘토로 통한다. 이날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이사장 자격으로 참석했다. 조씨는 '거대한 불꽃 부마 민주항쟁' 시를 낭송했다. 언론인으로 부마항쟁에 참여했던 고(故) 임수생 시인의 시다.

항쟁 참여자 옥정애씨는 맨 앞줄 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 옆에 앉았다. 옥씨는 딸 이용빈씨가 무대에서 엄마에게 보내는 짧은 편지글을 읽자 눈물을 터뜨렸다. 김 여사는 그의 등을 어루만지며 위로하다 자신도 눈물을 흘렸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 등 정당 대표들이 참석해 문 대통령과 인사를 나눴다. 김명수 대법원장, 유남석 헌법재판소장, 권순일 중앙선거관리위원장 등 주요 5부요인이 참석했다. 정부·지방자치단체에선 유은혜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진영 행정안전부 장관, 김경수 경남도지사, 오거돈 부산광역시장, 허성무 창원시장 등이 자리했다.
【창원=뉴시스】배훈식 기자 = 문재인 대통령이 16일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경남대학교에서 열린 제40주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에 참석, 기념사를 하고 있다. 유신 독재 체제에 저항해 부산과 마산(현 창원시) 일대에서 시작한 민주화 운동인 ‘부마민주항쟁’은 올해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2019.10.16. dahora83@newsis.com

③부마항쟁 역사적 의미…박정희 유신체제 종식 결정적 역할

부마항쟁은 박정희 유신체제에 항거하기 위해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이다. 당시 정권은 각종 시국사건에 대해 강압적으로 반정부 인사들을 체포·연금·구금했고 야당과 국민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1979년 5월30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 총재가 선출되는 파란이 항쟁의 시발점이었다. 신민당이 강경 대여투쟁 노선을 전개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10월4일 김영삼 총재의 의원직 제명안을 변칙적 방법으로 국회에서 통과시켰고 가택연금했다.

부산대학교 학생 5000여명은 10월16일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단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내에서 반정부 시위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시위는 부산 시내 중심까지 확대됐고, 이튿날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시위 규모가 커졌다.

이후 시위는 마산과 창원으로도 확산됐다. 경찰력만으로 진압이 어렵다고 판단한 박정희 정권은 18일 0시를 기해 부산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군을 투입해 1000여명을 연행했다. 20일에는 마산과 창원에 위수령을 발동해 500여명을 붙잡았다.

부마항쟁의 수습 방안을 놓고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26일 격렬한 언쟁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총탄을 날리며 유신체제는 사실상 종말을 고했다.

부마항쟁은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항거한 1960년 4.19혁명 이후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을 통해 국민주권과 민주헌정 질서의 회복을 추구하며 본격적 민중항쟁의 지평을 연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부마항쟁의 정신은 5.18 광주민주화 운동과 6.10 민주항쟁으로 이어졌다.

부마항쟁은 그러나 그동안 민주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저평가되기도 했다. 유신체제가 무너진 후 전두환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관련 자료를 숨기거나 없앴기 때문이다. 지난달 24일 국가기념일로 지정돼 한국 현대사 4대 민주항쟁 중 하나로서 재평가받았다.

문 대통령은 이날 기념식에서 "지난 9월 부마민주항쟁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고 오늘 처음으로 정부주관 기념식"이라며 "4.19혁명과 5.18광주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과 함께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국가기념일로 기리게 돼 국민들께서도, 시민들께서도 더욱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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