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바라기' 국민청원… 국회, 'n번방' 기회 잡을까

[the300][런치리포트]

이해진, 이원광, 서진욱 기자 l 2020.02.13 06:03
①문턱 낮춘 '국회청원'…'n번방' 딛고 '청와대청원' 만큼 될까

지난 10일 통과된 '텔레그램에서 발생하는 디지털성범죄 해결에 관한 청원' 페이지. /사진=국회 국민동의청원 홈페이지 캡처.


"텔레그램 n번방, 반드시 입법완료 약속드린다"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지난 12일 원내대책회의에서 ‘국민법안 1호’ 입법 의지를 보이며 한 말이다. 

지난달 15일 ‘국회동의청원’ 홈페이지에 게시된 ‘텔레그램을 통한 디지털 성범죄를 막아달라’는 글이 청원 성립 기준인 10만명 동의를 달성했다. 

‘의원소개’ ‘청원서류’ 등 높았던 기존 청원 문턱을 대폭 낮춰 도입한 ‘국회동의청원’이 ‘1호 국민법안’ 성과로 이어질 수 있을까. 

◇‘n번방 사건’이 뭐길래…청원 내용은?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은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텔레그램에서 주로 미성년을 상대로 협박해 신체노출 사진 또는 영상을 찍어 올리도록 한 뒤, 이를 유포하는 신종 ‘디지털 성범죄’를 말한다. 

트위터 등 SNS에 자신의 신체 노출 콘텐츠를 올린 미성년자에게 접근해 개인정보를 빼낸 뒤, 이른바 ‘몸캠 피싱’처럼 주변인에게 노출 사진을 보내겠다고 협박해 피해자에게 노출 사진과 영상을 계속 얻어낸다. 이러한 대화방이 여러개 만들어지면서 ‘n번방’이라 불린다.  

청원글은 경찰의 국제공조수사, 수사기관의 디지털 성범죄 전담부서 신설,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양형기준 엄격화 등을 요구했다. 경찰은 이미 2018년부터 전국 지방청에 ‘사이버성폭력 수사팀’을 만들었다. 

양형기준은 대법원 양형위원회 소관이다. 청원글 자체 내용보다 취지에 맞춰 처벌 형량을 높이도록 입법하는 등의 수정이 현실적이다. 


◇국회로 넘어간 ‘n번방’ 입법까지 과정은?

국회에 접수된 청원은 우선 내용과 성격에 맞는 상임위원회에 배분된다. 이후 각 상임위의 청원심사소위에서 심의를 거쳐 전체회의와 본회의에 회부되거나 본회의에 부의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면 기각(불부의) 결정이 내려진다.

법적 근거가 없는 청와대 국민청원과 달리 국회 국민동의청원은 국회법상 청원이 성립되면 소관 상임위가 청원을 심사할 의무가 있다. ‘n번방 청원’은 지난 11일 법제사법위원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행정안전위원회, 여성가족위원회 등 관계된 위원회에 회부됐다. 

국회 사무처에 따르면 ‘n번방 법안’ 주관 상임위는 법제사법위원회가 유력하다. 앞으로 여야 법사위 간사가 합의해 청원심사소위를 열면 법률 개정, 제도 개선 등 방식으로 채택돼 본회의에 부의돼 처리되는 길이 마련된다. 

‘누가’ 법률안을 맡을 지도 관건이다. 청원심사소위에서 심사를 거쳐 법률 개정, 제도 개선 등 방식이 결정된 뒤 의원이 대표로 실제 법률이나 제도 개선안을 짜야한다.

민주당 지도부가 입법완료 의지를 밝힌 만큼 민주당 소속 법사위 의원이 맡을 가능성이 높다. 한 법사위 의원실 관계자는 “민주당 원내대표실에서 법사위 의원을 찍어 맡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20대 국회 청원 채택율 2%…관건은 여야합의

민주당이 입법을 공언했기에 야당이 따라줄 지가 관건이다. 자칫 여당의 성과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사상 첫 국민청원의 입법성과는 여야 정치력에 달린 셈이다. 

문제는 지금까지 국회청원제는 유명무실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20대 국회에서 198건의 청원이 접수됐지만 채택은 4건, 2.02%에 불과했다. 

본회의 심사소위가 열렸으나 본회의에 넘기지 않은 청원이 30건에 이르며, 위원회에 계류된 청원은 164건에 달한다. 이중 법사위는 20건이 접수돼 본회의불부의 5건, 위원회 계류 15건으로 가결된 청원이 없다.


②'텔레그램 n번방' 사건…국회, 靑 넘을 수 있을까



국회가 이른바 ‘텔레그램 n번방’ 사건에 주목하는 이유는 국회가 운영하는 전자청원 시스템과 무관치 않다. 해당 사건이 입법화되면 국회 전자청원 시스템의 첫 번째 성과로 기록되기 때문이다. 국회가 국민적 신뢰를 받지 못하면서 국회 청원제도가 유명무실하다는 오명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를 잡은 셈이다.

◇'국회 전자청원 시대' 개막…'아는 의원' 없어도 청원 가능

여야는 지난해 4월 국회법 개정안을 의결하면서 ‘국회 전자청원 시대’를 예고했다. 개정안은 국회에 청원하려는 자는 국회 규칙으로 정하는 기간 동안 일정한 수 이상의 국민 동의를 받아 청원서를 제출해야 한다는 내용을 추가했다.

기존 국회법은 의원 소개를 받아 청원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일반 시민의 경우 좀처럼 국회를 찾을 일이 없다는 점에 비춰, 기존 국회 청원제도가 시민들의 접근성을 떨어뜨린다는 지적이 끊이질 않았다. 이는 해당 제도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핵심 이유로 꼽혔다.

국회는 속도를 냈다. 국회 운영위원회는 지난해 8월 제출된 문희상 국회의장의 개정 의견을 적극 수용해 같은해 11월 국회청원심사규칙 개정안을 위원회안으로 내놨다. 해당 안건은 지난달 9일 국회 본회의를 속전속결로 통과했고 마침내 국회 전자청원 시대가 개막했다.

◇'라이벌' 청와대 국민청원 넘어라

전자청원 시스템 도입에 따라 청원하려는 시민은 국회 ‘국민동의청원’ 홈페이지에 관련 내용을 게재하면 된다. 등록일로부터 30일 내 100명 이상 시민의 찬성만 있으면 된다. 올들어 이같은 방식으로 접수된 청원은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포함해 모두 8건이다.

이어 10만명 이상 시민이 동의하면 국민 청원으로 정식 접수된다. 이어 해당 청원 내용과 관련된 법 개정 사안들이 각 상임위원회 청원심사소위에 회부되고, 소위에서 결론이 난 청원은 본회의 상정과 표결 등을 거쳐 입법화된다. 기존에 운영되던 의원 소개 방식의 청원 제도도 함께 운영된다.

국회가 이같이 전자청원 시스템 도입에 속도를 낸 것은 대의 민주주의 체제에서 민의를 대변하는 국회의 역할을 회복하기 위해서다. 의원들은 지역별·계층별·세대별 지지자의 뜻에 따라 선출된 권력임에도 낮은 신뢰 등으로 인해 사실상 시민들로부터 외면 받는다는 지적이 나오는 상황이다.

활성화된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은 이같은 분석을 뒷받침한다. 국회가 시민들의 청원을 해결하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면서 시민들의 목소리가 청와대로 쏠린다는 비판이 끊이질 않았다.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이 시민 뜻에 따라 본회의 문턱을 넘으면 국회는 명예회복의 기회를 갖게 된다.

실제로 12일 오후 3시 기준 최근 한달간 청와대 국민 청원 게시판에서 답변을 기다리는 청원 수는 모두 676건으로 파악됐다. 2016년 5월부터 국회 전자청원 시스템 도입 전인 지난해말까지 총 198건의 국회 청원이 접수된 것과 대조적이다.

◇남은 과제는?

청원심사소위 활성화는 과제로 남는다. 각 상임위는 국민청원을 수용하기 위한 청원심사소위를 운영하나 주요 법안 소위나 예산결산기금심사 소위에 비해 주목도 낮은 것이 현실이다.

국회에 따르면 2016년 6월부터 지난해말까지 국회에 접수된 국민 청원 198건 중 채택된 건은 전체 2.02%인 4건에 그친다. 이 가운데 30건은 본회의 부의되지 않기로 결론 났으나 나머지 164건은 본격적으로 논의되지 못하고 해당 상임위원회에 계류돼 있다.

지난해 12월 3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 모습. /사진=뉴시스.



③잠자는 '디지털성범죄' 법안들… '2월 국회'에선 논의될까?



'텔레그램 n번방 사건'으로 촉발한 디지털 성범죄 해결을 위한 입법 청원은 국회의 책임 있는 조치를 요구한다. 날로 확산하는 디지털 성범죄와 관련한 입법 논의는 이미 국회에서 여러 차례 논의됐다. 가해자 처벌 강화를 비롯한 다양한 입법 해결책이 제시됐으나, 관련 논의가 지지부진했다. 오는 17일부터 열리는 2월 임시국회에서 관련 개정안 처리가 강하게 요구되고 있다.

◇"디지털 성범죄 가해자 '처벌' 강화하자"… 윤소하·손금주·진선미 발의

국회에 발의된 디지털 성범죄 관련 법안의 상당수는 가해차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이다. 개정 대상은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다. 이들 법안 모두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됐다.

처벌 강화는 국민들이 가장 바라는 해결책이다. 서울시의 '서울 여성의 디지털 성범죄 피해 실태 및 인식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들은 디지털 성범죄 예방책으로 △가해자 처벌 강화를 위한 법제 정비(78.5%) △디지털 성범죄 및 온라인 이용 시민교육(57.3%) △피해 감시 모니터링 및 단속(50.2%) △유통 플랫폼 운영자 규제(35.2%) △피해자 지원을 위한 상시기구 확충(34.2%) 등을 꼽았다. 서울시가 지난해 15~27일 서울 여성 3678명에게 설문한 결과다.

윤소하 정의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개정안은 불법 촬영 및 유포 처벌을 강화하고, 협박 시 가중 처벌할 수 있는 내용을 담았다. 통신매체를 통한 음란물 유포와 불법 촬영 가해자 처벌 중 벌금 기준을 각각 500만원 이하에서 2000만원 이하로, 3000만원 이하에서 5000만원 이하로 높인다. 피해자를 괴롭히거나 협박할 경우 형의 50%까지 가중 처벌하는 근거도 넣었다.

손금주 민주당 의원의 개정안은 성폭력 피해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뤄지는 2차 피해를 예방하기 위한 내용이다. △피해 사실을 지속적으로 말하거나 △사실 적시하거나 객관적 사실이 아닌 내용을 불특정 다수에게 알리거나 △정보통신망 등을 통해 피해 사실 또는 허위 사실 적시할 경우 7년 이하 징역, 10년 이하 자격정지 또는 5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한다.

진선미 민주당 의원은 통신매체 음란 행위, 불법 촬영 상습범에 대한 가중 처벌을 위한 개정안을 마련했다. 최대 가중 처벌 비중은 50%다.

◇불법 촬영·유포 '원천차단' 입법 시도도… 문희상 "국회 '응답'해야"

불법 촬영과 유포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법안들도 발의됐다. 유승희 민주당 의원은 웹하드 등 온라인서비스제공자가 불법 촬영 피해자의 신고 접수를 받은 즉시 촬영물을 삭제하도록 규정하는 개정안을 발의했다. 불법 촬영과 유포에 대한 벌금 기준도 상향했다.

불법 촬영에 활용된 카메라 등 기계장치를 몰수하자는 입법 시도도 있다. 김삼화 바른미래당 의원은 불법 촬영 매체에서 영상을 복원해 촬영물을 유포하는 행위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는 법적 근거 마련을 제안했다. 체육시설 몰카(몰래카메라) 금지와 검사 및 처벌 근거를 마련하고,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에 대한 불법 촬영물 관리 책임을 규정하는 등 법안들도 아직 상임위 문턱을 넘지 못했다.

당초 디지털 성범죄 법안들은 2월 국회에서 다뤄지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됐다. 여야 이견 없이 상임위에서 의결한 민생 법안들과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대책들이 최우선 입법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청원이 최초로 '국민 법안'으로 이어질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면서 디지털 성범죄 관련 입법 논의가 빠르게 이뤄질 것이란 기대가 나온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이번 청원과 관련해 "10만 국민의 목소리에 이제 국회가 응답해야 할 때"라며 "회부된 청원이 2월 국회에서 논의돼 20대 국회 중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관련 위원회들이 심사에 박차를 가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어 "국회 사무처도 첫 번째로 심사되는 국민동의청원 과정을 잘 살펴, 국민의 목소리가 실질적인 입법으로 이어지는 데 부족한 점은 없는지 챙겨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