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심만 좇는 노선·무조건적 믿음 강요…사라진 '자정작용'

[the300]['대한민국4.0'을 열자][1회- '타락한 진영의식'의 원인]

강주헌 기자 l 2020.03.16 08:46
[편집자주]대한민국이 맹목과 궤변, 막말 등으로 가득한 '타락한 진영의식'에 갇혀있다. 타락한 진영은 시위와 농성, 폭력 등을 일으키며 생산적 정치를 가로막는다. 이를 그대로 방치하면 대한민국에 미래는 없다. 타락한 진영을 없애고 '건강한 진영의식'을 회복해 대화와 협상, 타협 등이 가능한 정치를 만들어야한다.

타락한 진영 의식은 이성의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다. 무조건적인 믿음만 강요한다. 오염된 진영 논리는 진영이라는 집단의 논리를 한 개인이 자신의 논리로 치환하는 걸 넘어 맹신한다는 걸 의미한다.

합리적 토론이나 논리적 공방 없이 무조건 상대 진영을 비난하게 만든다. 진영 내 철학이 빈곤한 탓이다. 가치 논쟁으로 진영이 성숙한 사례가 거의 없다. 한국 정치는 대중적 지지와 카리스마를 가진 정치인에 의해 좌지우지돼 왔을 뿐이다. 선거 시점에 맞춰 정계개편이 이뤄지는 등 ‘인물정당’, ‘선거정당’이 출몰해왔기 때문에 공공 철학의 기반이 약할 수밖에 없다.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약 200년의 역사를 가진 영미권의 현대 정당들은 다양한 계급과 대중 조직의 이익을 수렴해 자신들의 노선을 형성했다”며 “그러나 우리나라의 정당은 일관된 노선 대신 정치 상황 등에 맞춰 표심에 따라 유동적 모습을 보였다”고 지적했다.




◇철학이 빈곤한 보수와 진보…자정작용 사라졌다


보수와 진보, 각 진영 간 철학의 빈자리는 타락한 진영 의식에서 비롯된 ‘비난 정치’가 채웠다. 보수와 진보로 대표되는 더불어민주당과 미래통합당(옛 자유한국당)의 거대 양당이 여실히 보여준다. 각 당이 핵심 지지층을 의식해 양 극단의 목소리에 편승하고 다시 이를 증폭하는 게 ‘정치’로 포장된다.

표를 의식하는 정치인들은 극단에 치우친 목소리에 동조한다. 철학이 없으니 그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결국 건강한 진영은 사라진다. 지난해 이른바 ‘조국 사태’때 광화문과 서초동 집회에서 볼 수 있듯 ‘타락한 진영 의식→핵심 지지층→정치권 반응’ 등의 악순환이 이어진다. 핵심 지지층의 높은 충성도에 정치권은 발을 맞춘다. 보수와 진보 각 진영 내에 자정의 목소리도 사라진다. 대다수 국민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신 교수는 “정당들이 때로는 단기적 손실을 감내하고서도 여기(핵심 지지층)에 맞추려 한다”며 “진영 간 집단 대결하는 양상 속에서 그렇지 않은, 적잖은 유권자 층이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구도가 됐다. 한마디로 대결정치에서 소외된 모양새”라고 분석했다.

민주당 한 초선 의원은 “정치인들이 표를 먹고 살다보니 소위 ‘태극기’나 ‘대깨문’이라 불리는 양 극단을 향해 과감히 ‘이건 문제가 있다. 균형감을 잃었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며 “여당에서도 당의 입장과 조금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의원들은 공격당한다”고 말했다.




◇승자독식의 민주주의…강 대 강 대결로 수렴


모든 권한이 대통령에게 집중돼 있는 ‘승자독식’ 구조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집권 세력은 막강한 힘으로 상대방의 얘기를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인다. 야당 등 상대세력은 장외투쟁 등 무조건 반대로 일관한다.

‘승패’의 문제로 인식하기에 타협은 선택지에 없다. 타락한 진영 의식, 오염된 진영 논리는 이 지점을 공략한다. 적대적 공존 프레임은 서로에게 득이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진영 갈등의 수혜자와 가해자가 동일하다”며 “상대 진영을 인정하지 않고 나만 옳다고 하며 진영을 독점하는 정치인과 지식의 행태 등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이런 진단이 많았다. 대통령 중심제라는 권력이 집중된 정치 구조가 사유화된 권력을 만들어 냈다는 배경에서다. 권력구조 개편을 두고 2017년 초부터 시작된 개헌 논의가 여야의 이해관계에 따른 이견으로 속도를 내지 못했고 결국 무산됐다.

당시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개헌특위)에서 활동한 성일종 자유한국당 의원은 “다원화된 국민들의 목소리를 수렴해야 하는데 승자독식의 대통령제 하에서는 협치가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어 “다원화의 대표적인 예가 영·호남으로 갈린 지역감정인데 분권형으로 구조가 바뀌면 권력을 공유하는 게 가능하기 때문에 사회적 갈등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은 “대통령 권력이 과도하게 크고 영향력을 놓지 않으려는 욕망이 정치를 망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헌법은 필연적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개헌이 능사가 아니다. 현 제도 하에서도 다수 정치연합에게 총리직을 주는 등의 방법으로 자신의 권한을 절제해 쓸 수 있다”고 말했다.
제21대 총선을 한달 앞둔 3월1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 선거관리위원회 안내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약화된 공동체주의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주도권 다툼 과정에서 진영 의식이 타락했다는 분석도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등 우리 사회 다양한 분야에서 합리와 실리를 위한 담론은 자취를 감췄다. 우선 ‘공동체주의’의 약화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에 힘이 실린다. 사회 구성원 전체를 아우르지 못하는 등 공리(公利)는 안중에 없다.

개인이 모여 만든 집단은 또 다시 이기적인 선택을 하는 개인으로 전락하는 등 집단의 이해관계만 추구하는 시대에 나타나는 현상이란 얘기다.

임현진 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마피아’를 예로 들었다. 임 교수는 “마피아는 사회적 자본을 잘 갖추고 있는 집단이지만 굉장히 폐쇄적으로 자신들만의 특수한 이해관계를 추구하기 때문에 좋은 집단이 아니다”며 “가령 서초동, 광화문 집회에 참가자들을 보면 자기들은 옳은 거고 상대방은 틀리다고 한다. 결속력은 굉장히 강한데 공공성은 약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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