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꾼'들의 개헌은 실패…"내 삶을 바꾸는 개헌을 해야"

[the300]['대한민국4.0'을 열자][4회-下]

강주헌 기자 유효송 기자 l 2020.03.29 06:00

편집자주 대한민국이 맹목과 궤변, 막말 등으로 가득한 '타락한 진영의식'에 갇혀있다. 타락한 진영은 시위와 농성, 폭력 등을 일으키며 생산적 정치를 가로막는다. 이를 그대로 방치하면 대한민국에 미래는 없다. 타락한 진영을 없애고 '건강한 진영의식'을 회복해 대화와 협상, 타협 등이 가능한 정치를 만들어야한다. 그래야 '대한민국4.0'을 시작할 수 있다.


지난 2018년 5월2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대통령 개헌안 표결을 하고 있다. 이날 대통령 개헌안은 정족수 부족으로 불성립됐다. 2018.5.24/뉴스1




건강한 진영의식 회복해야 '내 삶을 바꾸는 개헌' 성공한다



국가가 사람의 ‘몸’이라면 헌법은 ‘뼈대’다. 몸이 커지면 뼈대도 함께 자란다. 몸은 자라는데 뼈대가 그대로라면 큰 문제다. 대한민국 헌법이 그렇다. 바꿀 때가 한참 지났다.

헌법개정(개헌)은 민주국가 통치 체제의 근간을 바꾸는 작업이다. 시대정신을 비롯해 중요한 가치를 정비하는 절차다. 1987년 대통령직선제 개헌 이후 30년이 훨씬 지났지만 개헌은 구호에 머물고 있다. 구호마저 ‘권력 구조’에만 쏠린다.

시대 정신, 가치 등은 뒷전이다. 개헌을 주장하며 가치를 외치는 ‘정치가’는 없다. 눈 앞의 이해관계만 따지는 ‘정치꾼’들이 개헌을 정쟁의 수단으로 삼는다. 개헌마저 ‘타락한 진영의식’에 물든다.

◇권력 좇는 '이합집산' 정치…정당 '지향점'은 어디에

선거를 앞두고 벌어지는 정당의 이합집산은 개헌 실패의 주범이다. 권력만 좇아 세력을 합치고 당적을 바꾸는 흐름 속 건설적 대화는 없다. 선거에서 이기는 유일한 목표다. 일단 이기는 게 먼저다.

가치를 지키는 노력은 사치다. 정당이 지향하는 바를 담은 당헌·당규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유다. 당헌·당규는 각 진영과 정치세력의 가치, 정체성, 협치 등의 내용을 압축해놓은 당의 간판이다.

하지만 각 정당은 당헌·당규를 온라인 홈페이지에 걸어놓은 게 전부다. 선거 승리를 목적으로 당을 쪼개고 붙이는 과정에서 당헌·당규는 짜깁기되며 철저히 훼손된다.

이런 ‘정치꾼’들에게 개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시대정신의 반영, 가치의 진화 등을 고민하지 않는다. ‘국면 전환용’ ‘정략적’ 등의 수식어만 붙는다.

집권 막바지 대통령이 국정 장악력이 떨어질 때 쯤 개헌 이슈를 들고 나오고 차기 대선 주자들은 “내가 대통령이 되면 하겠다”고 반대하는 그림은 익숙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은 모두 집권 후반기에 개헌 논의에 불을 지폈다. 하지만 당시 야당과 유력 대선후보가 반대해 진척은 없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6년 10월 24일 대한민국 국회 시정연설에서 개헌을 언급했다. 정부 출범 전 본인이 개헌을 공약했고 19대와 20대 국회를 거치며 여야를 막론하고 개헌 요구가 나왔다. 그러나 집권하고 나선 모른체 했다.

2017년 4월 대선 전에는 자유한국당과 국민의당, 바른정당 3당이 자체 개헌안을 내놨다. 대선을 전후로 ‘반(反) 문재인’ 전선 구축을 통한 정국 주도권 확보를 위해서다. 또 대선 이후 예상되는 정계개편 속에서 소수당들의 생존 전략도 맞물렸다. 당시 유력 차기 주자 문재인 후보를 둔 더불어민주당은 대선 전 개헌에 반대했다.


◇개헌 논의의 또 다른 '블랙홀'…권력구조 개편

진보와 보수 양 극단에서 ‘타락한 진영의식’을 키우는 정치꾼들의 행태는 당이라는 옷만 갈아 입었을 뿐 되풀이됐다. 집권여당에 속했을 땐 대통령 등 살아있는 권력을 지키고 야당에 있을 땐 분권을 강조하며 권력구조 개편에만 목매는 쳇바퀴 논의만 한다. 각 진영의 열성 지지자들은 이들에게 힘을 보탠다.

정치인들의 추구해야 할 가치에 대한 고민은 사라진다. 국민의 기본권 확대 등 정작 필요한 주제는 아예 테이블에 오르지 못한다. 권력 구조 개편을 중심으로 개헌 논의 자체가 정치 공세의 카드로 이용된다. 개헌 논의 안에 권력구조 개편이라는 또 다른 ‘블랙홀’이 있는 셈이다.

이내영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촛불정국을 거쳤지만 민주주의의 위기가 오히려 연장되는 되는 경향이 있다”며 “분권 논의는 사라지고 청와대의 힘이 더 세지고 권위주의화 돼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개헌이 무조건 필요하다는 원론적인 자세를 버려야한다”며 “정치리더들이 국민 삶을 위해 반드시 개헌이 필요하다는 자세로 개헌 논의를 정직하게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방향은 '내 삶을 바꾸는 개헌'

‘타락한 진영의식’은 극단과 이분법을 강요한다. 다양성과 공존을 꺼린다. 다층적·다면적 현안과 가치를 합리적으로 논의할 토대조차 없다. 눈 앞의 이익만 쫓는다.

반면 지더라도 가치를 지키는 노력이 건강한 진영의식을 키운다. 극단의 세력이 아닌 대의를 꿈꾸는 정치가를 만든다. 승패가 아닌 가치가 중심에 놓인다.

개헌에 대한 접근도 마찬가지다. 국민 삶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 공허하지 않고 가치를 공유할 수 있다. 개헌 논의는 중장기 과제에 대한 공감 형성의 과정이다. ‘양극화’는 ‘경제민주화’로, ‘사회안전망 부재’는 ‘복지확대’ 등으로 논의를 확장해 건설적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노동, 소수자 인권, 인간과 함께 살고 있는 동물, 인공지능(AI), 젠더 등 진지한 논의를 통해 만들어야 할 뼈대가 적잖다.

권력 구조 개편 등에 매몰되기보다 민주주의, 인간의 기본권, 생존권, 환경권 등 새 시대에 맞는 논의를 정치권이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정치 분야로 좁히더라도 권력구조 개편 외에 선거제도 개혁, 지방분권, 대의제를 견제하는 직접민주주의 등 개헌에 반영돼야 한다고 평가받는 다양한 현안이 있다.

20대 국회에서 4차 산업혁명 특별위원회 위원장과 정치개혁특별위원회 간사를 지낸 김성식 무소속 의원은 “분권, 협치 등 정치구조개혁 말고도 우리 사회의 상생을 위한 시스템 개혁이 필요하다”며 “국회가 그 과정에서 ‘끼리끼리’ 문화를 버리고 다양성을 어떻게 담보할거냐는 정치적인 판단의 문제가 숙제다. 그 기준엔 미래세대에 대한 고민도 포함된다”고 말했다.




20대 국회 개헌특위 첫발…선거 득실 따지다 '제자리'



2016년 출범한 20대 국회의 사명 중 하나는 헌법개정(개헌)이었다. 이듬해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면서 개헌 논의에 불이 붙었다.

당시 ‘기본권’과 ‘지방분권’에 방점이 찍혔다. 국민을 닮은, 국민의 요구를 반영한 헌법을 만들자는 게 골자였다.

정치권은 거꾸로 행동했다. 기본권 대신에 권력 구조를, 국민 대신 선거 셈법을 먼저 생각했다. 87년 체제를 벗어나는 게 ‘개헌’인데 정치권은 여전히 ‘87년 체제’에 머물며 달라진 대한민국을 외면했다.

국회가 손 놓고 직무유기를 한 것은 아니다. 2017년 1월, 국회는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개헌특위)를 발족하며 발걸음을 뗐다. ‘국정농단’ ‘탄핵’ 이후 대한민국의 ‘뼈대’를 만들 필요성이 높았다.

국회는 권력이 집중된 ‘승자독식’ 구조가 진영 갈등을 유발한다고 봤다. 모든 권한이 대통령에 집중돼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얘기를 듣지 않고, 자기 진영의 목표를 위해 밀어붙이는 걸 원인으로 지목했다.

그해 5월 문 대통령이 2018년 지방선거에서 개헌 국민 투표를 하자는 후보 시절 공약을 수면 위로 올렸다. 국회 개헌특위도 발맞춰 개헌 로드맵을 마련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87년 체제’를 마무리하고 다음 세대로 나가기 위해 정치권은 시대정신과 가치를 논해야 했는데 논의는 진척되지 못했다. 분출하는 개헌 요구에도 정작 잡히는 것은 없었다.

한해동안 권력구조 개편 이슈에만 매몰된 탓이다. 국회 개헌특위는 여야간 정쟁의 장(場)으로 전락했다. 여당은 4년 중임제를, 야권은 분권형 대통령제만 주장하며 눈 앞의 득실만 따졌다. 개헌 투표가 지방선거에 미칠 영향 등을 계산하는 여야 셈법도 마찬가지였다.

여당은 ‘6월 지방선거 동시개헌’ 입장을 고수했고 야당은 6월 투표 반대로 맞섰다. 기본권 등 가치에 대한 논의는 사장됐다. 타락한 진영 논리를 깨기 위해 머리를 맞댔지만, 결국 같은 이유 때문에 실패했다
.
‘공약 이행’ 명분으로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3월, ‘대통령 4년 연임제’를 골자로 한 개헌안을 국회로 보냈다. 하지만 국회는 ‘대통령 개헌안’을 펼쳐보지도 않았다.

국회 개헌특위안에 담아보려는 시도조차 없었다. 방송법 처리, 드루킹 특검 등을 놓고 싸우느라 정신없었다. 야당이 장외투쟁을 시작한 시점도 이 때다.

결국 6·13 지방선거와 헌법개정 동시투표의 전제조건으로 처리돼야 하는 국민투표법이 시한을 넘겼다. ‘대통령 개헌안’도 최종 폐기됐다.

지난해 11월, 문 대통령이 여야 5당 대표 초청 만찬에서 개헌에 대한 의지를 다시 한 번 피력했지만 키를 쥐고 있는 국회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2년 전 지방선거가 2020년 21대 총선으로 변했을 뿐 상황은 같다.

여야가 선거제도 개편에 촉각을 세우면서 개헌 논의는 다시 블랙홀 너머로 사라졌다. 21대 국회의 최우선 과제로 개헌이 꼽히지만 전망은 밝지 않다. 대의를 지향하기보다 소탐만 꾀하는 정치권의 현실 때문이다. 눈 앞의 승리, 이익만 위해 ‘꼼수’ ‘편법’을 당연하게 구사하는 이들이 가치와 시대정신을 담는 개헌을 논하기 쉽지 않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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