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소장파' 정병국, 문화·인성으로 꿈꾸는 국가혁신

[the300][국회의원 사용설명서]정병국 새누리당 의원

오세중 기자 l 2015.05.19 06:03

그래픽=이승현 디자이너


"평화는 무기(총)뿐 아니라 문화로도 지킬 수 있다"

지난해 1월 경기도지사 선거에 출마한 정병국 의원(새누리당)은 자유로 주변의 철책을 설치미술로, 망루도 밤에는 경계시설로, 낮에는 도서관 등으로 활용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문화에 천착해 온 그다운 발상이었다.

'예상치 못한' 남경필 의원의 도전으로 경기도지사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경기도를 문화와 산업이 어우러지는 거대 복합단지 그 자체로 만들겠다는 그의 꿈은 아직도 유효하다.

 

정의원은 한번 마음먹으면 끝까지 해내는 근성과 아울러 문화를 이해하는 부드러움을 겸비하고 있다.


초등학교 5학년에 겁없이 서울 유학 감행, 강제징집을 거부한 뒤 해병대에 자원입대, 정치인으로서 원조 소장파의 대표주자, 그가 걸어온 길은 간단치 않다.
 '좋으면 좋은대로' 두루뭉술 넘어가는 것이 없다. 그 스스로도 '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고 자평할 만큼 고집이 있다.

그러나 그 고집스러움으로 '문화'라는 한 길을 걸어오며 '공감'이라는 부드러움도 길어올렸다. 그는 큰 형을 뒷바라지 하면서 수준급이 된 요리를 즐긴다.  늦둥이 딸바보로서 자녀들과 끊임없는 스킨십을 갖고, 틈만 나면 공연 등 문화 활동을 즐기려고 노력한다.

[인간 정병국-촌놈 자연인, 늦깍이 인생을 시작하다]
정 의원의 삶은 평범하지 않았다. 주어진 길을 거스르며 오는 피로감과 맞서 온게 그의 삶이었다.

서울 유학의 꿈을 갖고 있던 꼬마 정병국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의 중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아버지께 유학의 꿈을 얘기했다가 거절당했다.

정 의원은 "그 때 처음으로 아버지와 자신의 갈 방향에 대해 대척점에 섰다"고 회상했다. 그가 내놓은 수는 등교거부였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학교를 보내는 아버지를 피해 산으로 도망가 놀다 내려오고 피해다니기를 한달.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그의 아버지는 승복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형의 빨래와 식사를 챙기면서 시작된 단칸방 서울 생활은 쉽지 않았다. 그러던 그에게 '문화'라는 화두가 가슴에 박히는 일이 발생한다. 중학교 2학년 때 단체로 본 연극 '무녀도'를 보게 된다. 그는 국립국장의 웅장함과 연극 배우를 현실에서 접한 문화적 충격이 연극, 미술, 음악, 영화 등에 빠지게 만들었다고 술회했다.

'볼거리'로 시험을 망친 후 야간고교에 입학했고, 아버지의 별세로 그마저 그만둔 후 대학까지 재수하면서 남들보다 2년 늦게 대학에 들어갔다. 유신의 광풍 속에서 수배와 도피를 반복하다 결국 붙잡힌 그는 지도교수의 도움으로 아래 군 입대 각서를 쓰고 풀려났다.

'독종' 정병국의 면모는 이때도 발휘된다. 그는 '강제징집'으로 가느니 내 발로 가겠다며 해병대에 지원했다. 군 제대후 민주화 운동을 이어가다 그는 1987년 6월 항쟁 때 결국 구속됐다. 당시 변호인단은 김영삼(YS)과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주도했던 민주화추진협의회에서 구성됐고 이후 친구의 부탁으로 정치인 YS 캠프에 참여하면서 YS와 인연을 맺는다. 

 

비서관 10년 만인 2000년 드디어 국회의원이 됐다. 하지만 뱃지가 낯설어 처음에는 본회의장 국회의원 전용 출입구를 한달 동안 뱃지를 달고도 다니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수한 당시 국회의장이 "정 의원, 왜 국회의원 전용문이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머뭇거리는 그에게 김의장은 "뱃지를 달고 그 문에 들어설 때마다 국민이 왜 국회의원 칭호를 주고 예우를 해주는 지 되새기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정의원은 비로소 전용출입구를 이용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키워드➀–인성이 답이다]

정 의원은 영어가 콤플렉스라고 스스로 말한다. 중 1때까지만 해도 시험을 보면 늘 '100점'을 맞을 정도로 영어를 잘했다. 그런데 중2때 억울한 사건이 발생한다. 영어선생님이 시끄러운 교실안을 향해 떠든 사람을 손들라고 했고 다들 모른 척 할 때 정 의원 혼자 손을 들었다. 그는 혼자 교탁으로 불려나가 따귀를 맞았다. 그 수치심으로 인해 영어 선생님도 싫어지고 그 이후 영어시간마다 딴짓을 했다. 


그 때 선생님이 '인성교육'차원에서 정직하다고 오히려 칭찬 한 마디 하고 넘어갔으면 더 영어 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을 텐데, 어린 정병국은 영어책을 내팽개쳤다.
그가 처음 인성교육을 생각하게 된 사건이었다. 정 의원이 개인적으로 집안에서 펼치는 인성교육은 밥성머리 교육과 스킨십이다.

정 의원은 "아들을 갓난아기 때부터 직접 목욕을 시켰고 (그가 아끼는) 딸도 지금은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됐지만 어릴 때 목욕을 시켰다"면서 "바뻐서 얼굴 못 마주칠 때도 아침 저녁으로 안아주고 뽀뽀를 하며 애정표현을 한다"고 얘기했다.

그는 이런 맥락에서 국회 인성교육실천포럼 상임대표를 맡고 있다. 최근 연이은 군부대 사고도 인성 차원에서 접근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국회 군 인권개선 및 병영문화혁신 특별위원회 위원장직도 겸하고 있다.

그는 "인성교육을 법으로 규정해야 할 만큼 우리사회가 피폐해졌다는 의미에서 안타깝다"면서도 인성교육이 국가 혁신의 핵심과제라고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병영문화 역시 인성이 갖춰지면 군대 내 구타, 가혹행위가 자연히 사라질 수 있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키워드➁-문화강국]
정병국 의원은 초선 때부터 11년간 '문화' 상임위에서 일했다. 2000년 당시 문화관광위원회는 정속수가 '미달'일 정도로 인기가 없는 상임위였다. 

그는 자신있게 "한눈 팔지 않고 문화에 정진했다"고 강조한다. 문화에 대한 천착이 2010년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2011년 대한민국의 문화를 총괄하는 문화부 장관까지 오르게 된 동력이 됐다.

그의 경기도지사 꿈도 문화라는 화두와 닿아 있다. 경기도를 K-밸리로 만든다는 것 역시 문화가 소중하다는 그의 생각이 담겨 있다.
정 의원은 "해외관광객 1000만명을 넘는 시대에 볼거리가 있으면 지역경제가 살아난다"는게 그의 소신이라고 밝혔다. 그 중심에 문화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파주, 연천, 고양, 김포 등 세계평화공원이 조성될 것으로 기대되는 서북부 지역은 'K-팝밸리'를 만들고, 자신의 지역구가 포함된 가평, 양평, 포천, 남양주, 여주, 이천을 아우리는 동북부 지역은 'K-아트밸리'라는 문화·예술 특구로, 남부지역은 문화와 기술혁신의 아이콘이 될 수 있는 한국판 '실리콘밸리'인 'K-밸리'로 만들고 싶다"고 강조했다. 
문화융성을 통해 인성, 교육 등의 가치를 살리고 경제도 부흥시킬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연관검색어- 평창동계 올림픽]
정 의원은 문화부 장관이 된 후 2번 유치 실패를 경험한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세번째도전했다. 이미 실패를 삶에서 경험해온 그는 큰 산을 어떻게 넘어야 할지 미리 알고 있었다.

정 의원은 김연아 선수가 발표한 '드라이브 더 드림' 프로젝트, 미국에 입야된 한국출신 스키선수 도비 도슨과 나승연 대변인이 프리젠테이션 '새로운 지평'을 준비하고 국민적인 성원에 힘입어 마침내 올림픽 유치에 성공했다.

결국 3수 끝에 동계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정 의원(당시 장관)은 금의환향 했다.

[대표법안 – 예술인 복지법]
한 방송작가가 처우와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고 훌륭한 재능을 가진 최모 작가가 생활고와 지병으로 사망했다. 이를 계기로 예술인 처우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정 의원은 '예술인은 가난할 수 밖에 없다'는 편견을 깨기 위해 '예술인 복지법'을 내놓았다. 정 의원은 예술인의 불행한 죽음이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며 "4대 보험이라도 받게 하자"며 동료의원들을 설득, 결국 법안을 통과시켰다.

정 의원이 대표 발의한 '예술인 복지법'에는 예술인의 고용 및 산업재해보험 가입,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설립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 예술인 지원단체·시설에 대한 재정적 지원의무를 부과하는 내용이다.

예술인은 임금채권보장법의 보호를 받고, 한국예술인복지재단도 설립해 예술인복지사업 자금을 충당하자는 내용이 이 법안의 골자다.

[그의 사람들-원조소장파는 내 친구!]
그의 정치이력을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소장파'라는 타이틀이다. 남·원·정(남경필, 원희룡, 정병국)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여당에서도 항상 정치개혁의 선보에 섰다. 

 정 의원은 '미래 연대', '새정치수요모임' 등을 거치면서 쇄신 그룹에서 이탈한 적이 없다.  4선의 50대가 됐지만 그는 "조용필이 영원한 오빠로 불리듯 '영원한 소장파'로 불리고 싶다"고 말했다.

정 의원의 정치 쇄신을 향한 행보는 현재 진행형이다. 지난 4월 12일 국회 사랑재에서는 정병국 의원을 필두로 새누리당 정두언 박민식 이이재 의원, 남경필 경기지사, 박형준 국회 사무총장, 오세훈 전 서울시장, 정태근 진수희 전 의원 등 여권의 원·내외 인사 30여 명이 함께 자리했다. 

정 의원은 "우리가 처음 정치를 시작하면서 부르짖었던 정치개혁, 정당개혁 등에 대해 다시 한 번 되돌아봤고, 그 선상에서 우리 당의 끊임없는 혁신, 보수 진영의 끊임없는 혁신을 해야 하는데 우리가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고 전했다.

[이 한 장의 사진]

 

천막당사행을 위해 한나라당이 당 문패를 떼는 모습.

쇄신파 남·원·정은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과 한나라당 차떼기 사건으로 당이 위기에 봉착했을 때 당 쇄신을 외치면서 천막당사를 주장했다.

정 의원은 천막 당사행 이후에도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원점을 돌아가겠다는 결심 아래 천막당사로 들어갔는데 몸은 이동했을지 몰라도 과거의 기득권적 사고를 버리지 못했다"며 당이 초심을 잃지 않게 직언을 날렸다.

[요주의]
중앙정치에 발휘한 역량에 비해 지역에서 역할이 상대적으로 두드러지지 못한다는 지적이 없지 않다. 그때문일까. 그의 명함에는 여전히 011로 시작하는 오래된 휴대전화 번호가 새겨져 있다. 과거 번호를 알고 있는 지역 주민들로부터 걸려오는 전화를 모두 받겠다는 의지이다. 

[프로필]
△1958년 경기 양평 출생 △서라벌고, 성균관대, 연세대·성균관대 대학원 △제16~19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부총무 △한나라당 홍보기획본부장 △한나라당 사무총장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장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 국회 인성교육실천포럼 공동대표 △ 외교통일위원회 위원△ 군 인권개선 및 병영문화혁신 특별위원회 위원장
그래픽=이승현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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