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앞의 '꼿꼿 완구'…부활의 아이콘

[the300][국회의원 사용설명서]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

김성휘 기자 l 2014.06.24 07:02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경제공무원, 국회의원, 충남도지사를 거쳐 다시 국회로 복귀한 그는 공직40년 경력을 자랑한다./이완구 의원실 제공


"지금 죽어야 할 상황이라면… 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
아내는 말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2009년 11월 28일 새벽, 이완구 충남도지사는 그렇게 '사퇴'를 결심했다.

그는 세종시 건설계획 수정 파문의 한가운데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2년 대선공약으로 제시했지만 2008년 정권이 바뀌었고 이명박정부는 수정추진에 나섰다. 충청 출신 정운찬 국무총리가 2009년 세종시 수정안에 드라이브를 걸자 세종시 수정은 여권 내에도 심각한 갈등을 불러왔다. 11월 27일, 이명박 대통령은 '대통령과의 대화' 방송에서 세종시 수정안을 공식화했다.

그는 반발했다. 도지사인 자신의 말을 믿고 대대로 내려온 논밭을 팔고, 부모님 산소를 이장한 지역주민들에게 수정안을 다시 내밀 수 없다는 것이다. 그해 12월3일, 도지사에서 물러났다.

이완구 새누리당 의원에게 '세종시'와 '충남도지사 사퇴'란 사건은 떼놓을 수 없다. 선거법 위반 등 불명예퇴진이 아니라, 정치적 이유로 광역단체장을 자진사퇴한 것은 초유의 일이었다. 당시엔 도정 공백 등 무책임한 일이란 비판도 나왔다. 하지만 그의 '승부수'는 세종시 원안을 고수한 박근혜 대통령과의 공감대 형성으로 이어져, 올 5월 새누리당 원내대표로 화려하게 복귀하는 발판이 됐다.

그는 머니투데이 더300과 인터뷰에서도 "세종시는 제 삶의 일부"라고 힘줘 말했다. "기본적으로 중앙과 지역이 수직관계에서 벗어나야 하고, 그 바탕위에 각 지역의 발전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도록 하고, 건전하지 못한 지방재정도 개선하고…" 세종시를 비롯한 지방 발전 방안도 머릿속에 가득했다.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 머릿속엔 무슨 생각이 가득할까?/이승현 디자이너

[프로필]

꼭 20년 전인 1994년 충남의 한 파출소. 고위간부로 보이는 이가 일선 경찰관들에게 지시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가 아니다. 소극적으로 보이지 않느냐. '무엇이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 방향을 바꾸라." 이완구 충남지방경찰청장이다.

올해로 공직 40년인 그에겐 최초·최연소란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성균관대 3학년 재학 중 행정고시(15회)에 합격, 권오규 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김성진 전 해양수산부 장관 등이 동기다. 두각을 나타낸 그는 20대에 경제기획원 사무관으로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에 참여했다.

경찰직으로 옮겨 최연소 경찰서장(31세), 최연소 경무관, 40대 초반 최연소 충북·충남지방경찰청장을 지냈다. 충남 경찰청장 시절 관내 200여곳 파출소를 모두 방문하는 열성을 보였다. 이렇게 서서히 이름을 알리던 중 1995년 지방선거를 맞이했다.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자민련 바람을 일으키며 민자당 홍성·청양 지역 의원을 영입, 그가 홍성·청양 지역구 위원장 '구원투수'가 됐다. 하지만 지방선거 결과는 참패. JP의 자민련 돌풍이 거셌다.

충격을 받은 그는 '관료티'를 벗고 바닥민심으로 들어가며 정치인이 된다. 1996년 15대 총선에 충남에서 유일한 신한국당 의원으로 당선됐다. 이처럼 신한국당에서 정치를 시작했지만 충남이 기반이란 점은 그에게 절묘한 정치감각과 함께 당적 이동이란 꼬리표를 남겼다.

국민의정부 때 자민련으로 옮겼다. 그는 "김종필 총리를 '총리서리'로 만든 신한국당에 지역 민심이 악화됐다"고 돌이켰다. 자민련 대변인 등을 맡다가 2000년 16대 총선에 재선, 원내총무(원내대표)를 지냈다.

그런데 2002년 대선을 앞두고는 다시 자민련을 탈당, 한나라당으로 옮겼고 이른바 '이적료 파문'에 휩싸인다. 한나라당에 입당하는 대신 일종의 이적료를 받았다는 논란에 정치적 타격이 컸다. 2004년 17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UCLA대 교환교수로 1년여를 보냈다. 2006년 6월 지방선거에 한나라당 충남지사 후보로 당선, 2년만에 공직에 복귀했다.

정치·행정·경제에 두루 능한 그는 도지사로 기업 및 외자 유치에 적극 나섰고 충남을 전국 최고 투자유치지역으로 끌어 올렸다. 2009년 도지사 사퇴 후 명예회복을 노렸으나 2012년 1월 뜻하지 않은 다발성 골수종(혈액암) 발병으로 병상에 누웠다. 고통스런 투병생활 끝에 건강을 회복한 그는 2013년 6월,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서 당선됐다. 9년만의 여의도 컴백이다.

2014년엔 집권여당 원내대표로 또다른 시험대에 섰다. 당 대표 공석 상황에서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전당대회를 관리해야 하고, 곧이어 재보궐 선거로는 역대최대규모인 7.30 선거를 지휘해야 한다. 야당과 원내협상을 주도하고 당청관계는 물론, 지역구 관리도 소홀할 수 없어 1인5역을 해야 한다. 그가 견지한 '선 굵은 정치'만 고수해 될 일이 아니다. 협상, 타협, 양보와 결단의 순간이 이어진다. 그는 "늘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바라보고 이해한다는 역지사지 좌우명을 되새길 것"이라고 말했다.

△1950년 충남 청양 출생 △양정고, 성균관대 행정학과, 미국 미시건주립대 석사, 단국대 행정학 박사 △행정고시(15회)·경제기획원 △홍성경찰서장 △LA총영사관 △충북·충남지방경찰청장 △15·16대 국회의원 △UCLA 교환교수 △2006~2009년 충남도지사 △2010년 새누리당 충남도당 명예선대위원장

[입법]

정치경력이 길지만 경제부처에서 공직을 시작한 데다, 국회의원 시절 재경위에서 활동하는 등 경제통으로 분류된다. 15대 국회만 해도 의원입법이 지금처럼 활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회 기록에 남은 1호 법안(대표발의)은 16대 국회인 2002년 제출한 증권거래법 개정안이다. 시세조작 등 불공정 거래행위 제보자를 포상하고 신분을 보장하는 내용이다. 고액체납자를 근절하기 위한 국세기본법 개정안, 화폐발행에 관한 사항을 규정한 화폐기본법 제정안을 각각 2004년 제출했으나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법안 '건수'가 중요하다고 생각진 않는다. 그는 "동료의원들이 발의하는 좋은 법안에 동참하는 것도 의정활동의 방법"이라며 "좋은 취지와 내용의 법안 70∼80여건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앞으로 제출할 '이완구법'은 어떤 내용일까. 지난달 원내대표에 취임하면서 국가시스템 업그레이드와 선진형 민생시스템 구축을 제시했다. 국가시스템에 대해선 안전행정·위기대응·부정부패 척결·관료개혁을, 민생시스템으로는 국민생명과 안전 우선시 패러다임 구축을 꼽았다.

특히 "우리 경제에 꺼져가는 불씨를 살리는 게 시급하다"며 "착한 규제와 나쁜 규제를 잘 구분, 관피아의 비리나 부패에 악용되는 나쁜 규제는 없애되 안전・환경, 경제민주화 등 좋은 규제는 더 엄정하게 준수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관피아' 논란 관련, 궁극적으로 행정고시(5급공채)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신중론이다. 그는 "행정고시가 인재 선발 경로로서 갖는 장점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며 "매년 정해진 인원을 뽑고 법에 따른 신분보장이 더해져 행정 비효율, 국민 혈세를 낭비하고 있다는 비판도 설득력이 있으므로 충분한 여론 수렴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고위 공직자는 퇴직 후 10년간 취업기관과 직급을 공개토록 하는 ‘취업이력공시제도’ 도입에 야당도 대체로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그밖에 보편적 복지보다는 선택적(맞춤형) 복지에 무게를 두고 있으며, 양극화는 반드시 해소해야 한다는 지론이다.

[그 주변엔 누가?]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은 스트레스를 적잖게 받는다. 멘토인 유흥식 주교(대전교구장)는 그런 그에게 큰 위안을 준다. 유 주교는 손수 편지를 쓰거나 식사를 함께 하며 '힐링'의 순간을 제공했다. 유 주교는 그에게 '영혼의 스파게티'인 셈이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에 대해선 "관용과 타협의 정치가"라며 존경의 뜻을 숨기지 않았다.

충청권 의원들이 그의 큰 자산이다. 충남도지사 시절 정무부지사를 지낸 김태흠 의원, 충남 행정부지사 출신 이명수 의원 등이 대표적이다. 정책위의장 주호영 의원, 원내수석부대표로 호흡을 맞추는 김재원 의원, 예산결산특별위원장이자 충남의 중진인 홍문표 의원도 든든한 인맥이다.

15대 국회 초선 동기는 2014년 현재 새누리당에 정의화 국회의장, 황우여 전 대표, 김무성 의원,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있다. 야권에는 설훈·이미경 의원 등이다.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은 세상을 떠났다.

이 원내대표는 15대 총선 당선과 동시에 당대표비서실장을 맡았다. 김영삼(YS) 당시 대통령이 낙점했다. 공교롭게 이홍구 대표도 15대 국회에 처음 배지를 달았다. 두사람은 대표-비서실장 관계였지만 국회 초선의원 연찬회에 '동급'으로 참석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당시 서청원 의원은 이미 4선 중진으로 당 원내총무(원내대표)였다.

[한마디]

'역지사지'가 좌우명이다. 하지만 그의 스타일을 더 잘 보여주는 말은 "아니다 싶으면 아니고, 필요하면 자리도 건다"(에세이집 '약속을 지키는 사람' 중에서)는 것이다. 정치인으로 약속 지키기가 가장 중요한 일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 책임을 진다는 게 소신이다. 그는 "도지사직을 던진 것도 결국 세종시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책임을 누군가는 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말했다.

[라이프] "완벽주의자입니까? 네"

정치를 하기 전부터 철저한 자기관리가 트레이드마크였다. 공직자로서 당연한 일이라 스스로를 다잡았지만, 지나보면 아쉬운 순간도 있다.

가족친지들을 왜 좀 더 따뜻이 대하지 못했는지 후회도 한다. 도지사 당선 뒤 막내동생에게 "충남 땅에 발도 붙이지 마라"고 했다. 그 뒤 사람들이 그 동생을 보면 '제 형만 나타나면 옆으로 슬금슬금 없어진다'며 '꽃게'란 별명을 붙였다고 한다.

자신을 뒷바라지하느라 고생한 아내, '엄한 아버지'였을 뿐 살갑게 대해주지 못한 두 아들에게도 미안한 기분이다. 그는 "친구관계에서도 사람 냄새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좌우명을 '역지사지'로 삼은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이런 일화들은 대개 완벽주의 때문이다. 공직자로 업무는 빈틈없이 하되, 구설수에 오를 일은 아예 가능성을 차단해버린 것이다. 그 덕분인지 자민련 대변인 시절엔 박태준 총재에게 '철두철미하다'는 평을 들었고, JP에게는 "번개가 치면 먹구름이 낄지, 천둥이 칠지를 아는 사람"이란 평가를 들었다.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오른쪽)가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정일 북한국방위원장과 악수하고 있다.


[이 한 장의 사진] 꼿꼿장수 이전에 꼿꼿완구

김정일 전 북한국방위원장을 직접 만난 정치인은 드물다. 그것도 보수정당에선 박근혜 대통령 등 극히 일부다. 이완구 원내대표의 경험은 그래서 더 인상적이다.

그는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때 이해찬 의원과 국회 대표 자격으로 김 위원장을 만났다. 당당하게 서서 악수하는 장면이 기록으로 남았다. 김장수 전 청와대 안보실장이 국방장관 시절 꼿꼿이 서서 김 위원장과 악수해 '꼿꼿장수'란 별명이 생겼는데 이 원내대표가 그 원조인 셈.

그는 "장성택 당시 노동당 행정부장은 김정일 앞에서도 시종 여유롭고 자유로운 태도여서 인상적이었는데, 작년에 처형당한 것을 보면 권력의 생리를 다시 한 번 느끼게 되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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