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투사 이회영의 손자 이종걸…"부끄럽지 않게 살 것"

[the300][휴먼스토리]이종걸 새정치민주연합의원

박용규 기자 l 2015.04.07 14:00


새정치민주연합 이종걸 의원은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다. 우당 선생은 독립운동가로 안창호 등과 신민회를 만들었고 독립군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를 만든 분이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변호사였으며 오랜기간 인권변호사로 활동한 이 의원은 유명한 시국사건이었던 강기윤 유서대필사건의 변호사이기도 했다. 43세 ‘젊은 피’로 현실정치에 뛰어든 그는 어느덧 4선의원이다. 5월에 있을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 선거에 출사표를 던진 이종걸 의원을 국회에서 만나 그의 조부와 정치역정에 대해서 들었다.

- 이회영 선생을 포함해 일가가 일제시대에 만주로 건너간 독립운동가의 자손이다. 해방이후 가족들의 삶에 대해서 말해달라

▶ 항일운동했던 분의 손자가 적진 않은데 대부분 넉넉하게 사는 사람들 없다. 안양 국회의원을 하게 된 것도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지역구내에 있는 병목안이라는 곳인데 어렸을 적에는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할어버지가 1936년에 옥사하신 후 할머니는 국내에서 정착하셨다. 어렸을 적에 할머님께 할아버지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그 때는 지금과 같은 감정은 아니었다.

은행원이셨던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뵙지 못했다. 다른 가족들에 비해서 그래도 형편이 괜찮았다. 정치한다고 하니 한번도 부모로서 당신 의견을 한 적이 없는데 이 때 유일하게 이 말을 하셨다. 정치를 해야 되겠냐. 할아버지 명예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느냐며 변호사도 됐고 위험하지 않게 살 줄 알았는데 왜 정치를 하려고 하는냐는 취지의 말씀이었다. 아직 이 질문에 답을 내리지는 못하겠다.

몇 년전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쫓는 답사를 다녀왔다. 이제는 정말 점점 더 아버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 같다. 귀중한 할아버지다. 할아버지와 우리 가문, 그리고 동료들의 삶의 흔적을 보고 나니 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분들처럼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는 칼날같은 정신을 유지하면서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 인권변호사로서 서울대 우조교 사건, 강기윤 유서대필사건 등 많은 사건을 맡았다.  변호사 시절 이야기를 들려달라

▶ 변호사는 고민대행업인데 시국사건 같은 경우는 더 힘들었다. 시국사건을 맡아 경찰서를 가면 경찰들이 3시간이고 기다리게 한다. 그렇게 기다리다가 막상 변호사 접견을 시작하면 피해자 기를 살려주기 위해 소리 지르고 그랬다. 영화 변호사와 똑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가족들이 해달라고 하니 당시는 선임계도 없이 갔다. 기억에 남는 사건은 강기윤 유서대필 사건과 박노해씨 사건등이다. 수형자 처우규칙 헌법 소원을 위해서 찾아갔던 대전교도소의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도 기억난다. 새정치민주연합 내에는 운동권의 전통이 있다. 이들에 비해 뒤에 있었고 부채감도 있다. 그 시절 기록을 언젠가는 책으로 쓰려고 가지고 있다. 그게 집 한채다.

그래도 그 때는 돈도 꽤 벌었다. 서울 쪽에서는 익명성이 확보돼서 그런지는 몰라서 그런 일을 한다고 수임이 안되지 않았다. 어떤 판사들은 더 잘해준다. 민변 변호사로 애쓰는 것을 알고 있다고 파격적인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 변호사 시절 초기부터 박원순 시장과 함께 했었던 것으로 안다. 이 의원에게 박시장은 어떤 존재인가?

▶ 박원순 시장이 연수원 2기 선배다. 사법 개혁 같이 할 만한 사람 찾다가 만났다. 변호사 시작할 때부터 같이했다. 10년을 한 사무실에서 함께 했다. 은혜도 많이 입고 그 분 통해서 변호사가 이런거구나 배웠다. 그분의 인권활동이 저에게는 큰 빽이 됐다. 거스를 수 없는 대선배다.

- 인권변호사에서 현실정치로 넘어왔다. 당시 상황을 설명해 달라.

▶ 안양에 초등학교 다니면서 오래 살았다. 첫 출마당시 이 지역은 자민련(자유민주연합) 지역이었다. 당시 1인 2표제로 DJP 연합이 깨져 당시 새천년민주당이 급작스럽게 공천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43살 때 일이었다. 당시로는 젊은 피였다. 인권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을 때 서울대 우조교 성희롱 사건 등으로 나름 유명했다. 당에서 만난 사람은 정균환 특보단장을 만나서 출마를 권유했다.

- 현실 정치 이야기도 좀 듣고 싶다. 야당의 지지율이 반등하는데 지금의 야당이 발전할 수 있는 키워드를 뽑는다면?

▶ 존재감이다. 강한 야당이 필요하다. 지금 지지율이 반등하고 있지만 이것은 야당에 대한 지지율이기보다는 여당을 좋아 하지 않는 사람들의 지지다. 현재 우리당은 싸우지 말라는 말을 너무 과도하게 해석해 져 주는게 점수를 따는 것이라는 생각하는 것 같다. 여당과는 분명한 차이점을 보여줘야 하며 그게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

- 국가 경제가 어렵다. 야당은 지속적으로 법인세 인상을 주장하지만 별다른 대안을 내고 있지 못하다는 평가가 있다. 이에 대한 견해는 어떤가?

▶ 경제를 살리는 대안을 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기업생태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 제조업 중에서 1981년 이후에 설립된 대기업이 없다. 최근 30여년동안 제조업으로 대기업으로 성장한 회사가 없는 것이다. 중소기업이 중견기업,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당에서 법인세 인상을 주장하는데 이는 사후개념이다. 세출이 필요해서 세금이 필요한데 적절하게 소득세를 내고 나머지를 법인세를 내는 것이다. 소득세를 많이 걷을 수 있는 사회가 되면 법인세 는 자연히 적게 낼 수 있다. 최종적인 소득원천은 개인이다. 소득용, 복지용, 일자리용으로는 정부가 무조건 돈을 써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세출구조에 대한 대안이 있어야한다. 세출구조를 보면서 적절한 소득세를 걷고 법인세를 정해야 한다. 이런 주장들이 임팩트 있게 전해질 수 있게 노력해야 한다.

- 4선 국회의원이다. 수도권에서는 3선도 힘들다. 지역구인 안양 만안구는 상대적으로 구 도심이다. 야당 의원으로 오랜기간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이 있다면?

▶ 뭐라해도 할아버지의 덕이다. 할아버지를 아시는 분들은 저를 굉장히 좋아해주신다. 이 분들이 매번 밀어주신다. 최근에는 숙원사업을 하나 해결했다. 인구 감소로 요새 중학교 신설이 힘들다. 지역구 내의 중학교 두 개를 통폐합하고 새로 하나 신설했다. 그 과정은 아주 힘들었다. 통폐합을 반대하는 지역에서 시위하는데 빌고 말씀도 드리고 했다. 그 과정에서 진심을 알아주신 것 같다.

-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 5월에 있을 신임원내대표 선거를 준비중이다. 당을 위해서 일을 좀 하고 싶다. 초재선때는 일을 많이 했는데 3선, 4선때부터는 좀 멀어졌다. 덩치가 커져서 그런지 일을 맡지를 못했다. 그 동안 일을 하지 못했던 7년간의 에너지와 혼신을 다해서 당을 위해 온몸을 다해서 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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