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서 '선글라스' 남긴 朴대통령, 미국선?

[the300] [이상배의 이슈 인사이트] '개방'의 상징된 덩샤오핑의 '카우보이 모자'

이상배 기자 l 2015.10.21 05:44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5월7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산책을 하고 있다. 사진=뉴스1 (청와대 제공)


냉전이 한창이던 1959년 2월23일 저녁. TV로 BBC 뉴스를 보던 영국 국민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자신들의 수상인 해럴드 맥밀란이 사실상의 적국인 소련 모스크바에 커다란 러시아식 털모자를 쓰고 나타나서다.

그리고 놀라움은 곧 환호로 바뀌었다. 털모자를 쓴 맥밀란은 이날 크레믈린에서 니키타 흐루시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와 만나 냉전 긴장 완화에 합의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첫 영소 정상회담이었다. 맥밀란은 "어떤 어려움과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위해 힘을 모으자"고 했다. 

맥밀란의 러시아식 털모자는 영국과 소련 양국 국민 모두에게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가 털모자를 쓰고 있는 사진은 이후 오랫동안 영소 간 평화의 상징으로 남았다.

국제외교에서 사진 한장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때론 백마디 말보다 강하다. 모자와 같은 소품을 활용한다면 효과는 배가된다. 방문국의 문화를 대표하는 모자를 쓴 상대국 정상 등 대표의 모습은 양국의 우호 관계를 대내외에 과시하는 효과가 있다. 방문국 국민들의 호감을 끌어내 자국에 유리한 정책을 유도할 수도 있다.


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해온 곳이 중국이다. 1979년 1월 미중 수교 직후 미국을 방문한 덩샤오핑 당시 중국 국무원 부총리는 카우보이 모자를 쓴 채 텍사스 로데오 경기장에 등장했다. 자신의 체구에 비해 지나치게 큰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환하게 웃는 덩샤오핑의 모습을 담은 사진 한장에 미국 국민들은 환호했다. 이는 중국이 '죽의 장막'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왔음을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사진으로 아직 남아있다.

1997년 미국을 찾은 장쩌민 전 주석은 영국 식민지 시절 유행하던 검은색 삼각모를 쓰고 '식민지 시대 민속촌'이 있는 버지니아주 윌리엄스버그를 방문했다.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은 인권 문제에 대한 견해 차 탓에 별 소득이 없었지만, 모자 덕분에 '이미지 외교'의 효과는 톡톡히 봤다.

후진타오 전 주석은 2006년 방미 때 시애틀 보잉사 본사를 찾아 이 회사 직원이 건넨 야구 모자를 쓰고 그를 두 번이나 포옹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시진핑 주석도 2012년 부주석 시절 미 로스앤젤레스(LA)에서 미국프로농구(NBA) 경기를 관람한 뒤 자신의 이름과 등번호 '1'이 찍힌 LA 레이커스팀의 유니폼을 선물받고 환하게 웃는 사진을 남겼다.

박근혜 대통령이 3박6일 간의 미국 방문을 마치고 18일 귀국했다. 한미 정상회담 등의 성과가 적지 않았음에도 KF-X(한국형전투기) 기술이전 무산 탓인지 지지율 상승폭은 1%포인트대에 불과했다. 지난달초 중국 방문 직후 지지율이 약 6%포인트 급등한 것과 대조된다. 방중 직후 지지율 급등은 선글라스를 낀 채 중국 전승절 열병식을 지켜보는 박 대통령의 사진이 널리 회자된 것과 무관치 않다. 이른바 '박근혜 선글라스'로 불린 이 모델이 방중 직후 품귀 현상을 빚은 게 이를 방증한다. 

그러나 이번 방미는 눈길을 사로잡는 사진이 보이지 않는다. 2013년 5월 방미는 한미 정상회담 직후 박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로즈가든 옆을 나란히 산책하는 사진을 남겼다. 이 사진 한장만으로도 '한미동맹'은 재확인됐다. 이번에도 같은 모습이 사진으로 포착됐지만, 신선도가 같을 수 없다.

청와대 한 참모는 "인상적인 사진을 위해 몇차례 건의를 했지만, 박 대통령이 인위적 연출을 좋아하지 않는다며 모두 거부했다"고 했다. 연출을 꼭 인위적으로 해야만 하는 건 아니다. 얼마든지 자연스럽게 메시지를 담은 사진을 남길 수 있다.

펜타곤(미 국방부 청사) 방문 때 장병들과 좀 더 자유롭게 어울렸다면 그런 사진 하나쯤은 남았을 터다. 하다못해 한 여군이 자신의 모자를 박 대통령에게 씌워줬을 지도 모를 일이다. 또는 방미 중 '한미 우호의 밤' 문화행사 때 연주자로 미국을 대표하는 재즈 뮤지션을 불러 인사를 나눴다면 어땠을까? 만찬 디저트로 미국식 컵케익을 먹었어도 좋았겠다. 이런 친근하고 인간적인 사진 한장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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