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생' 문재인, 그가 패배를 책임지는 방식

[the300]문재인 의원사용설명서

지영호 기자 l 2015.01.07 19:08

편집자주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의 의정활동과 관심사, 경력을 입체적으로 분석해 드립니다 . 의원의 경쟁력과 정치적 미래, 뿐만 아니라 국민의 '심부름꾼'을 어떻게 '사용'해야 우리 사회가 한걸음 나아가고 우리의 삶이 업그레이드 될 수 있을지, 분야별 '파워분석'을 통해 보여드립니다.

그래픽=이승현 디자이너

[새정치민주연합 차기 지도부를 뽑을 2·8전국대의원대회(전당대회)의 당대표 후보가 문재인·이인영·박지원(기호순) 3파전으로 최종 확정됐다. 기호순서에 따라 세 후보의 '의원사용설명서'를 연재한다]

1974년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어느날, 경희대 교시탑 앞에 한 숫기 없는 청년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학교재단은 퇴진하라”고 요구하며 선언문을 낭독했다. 이미 선언문은 비에 젖어 보이지 않았지만 청년의 연설은 막힘이 없었다.

 

이 연설을 발단으로 학생운동의 ‘비주류’였던 경희대에서는 시위운동이 확산됐고, 낭독했던 청년의 운명도 이즈음 결정됐다. 이 청년은 이후 부산 출신 변호사를 거쳐 단숨에 야권 대통령 후보로 발돋움했다.

대선에서 실패했지만, 여전히 친노계(친 노무현계)의 중심에 서 있는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61)은 이제 당대표에 도전한다.

“왜 문재인이어야 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대선패배의 책임을 지는 방식”이라고 답한다. 그래서 꺼내든 구호도 ‘이기는 정당’이다. 감성 대신 전략을 택한 셈이다. 다음달 8일 열리는 전당대회는 문재인표 ‘대선 재도전 프로젝트’의 첫 관문이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2014년 12월2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당 대표 경선에 출마하겠다고 밝히고 있다./사진=뉴스1

[프로필]
경희대 법학과에 수석 입학한 문 의원은 유신반대 투쟁에 앞장섰다. 1974년 유신반대를 주도하다 구류에 처했고, 이듬해에는 시위를 주도했다가 구속되기도 했다. 정범구 민주당 의원과 강삼재 한나라당 부총재와 연을 맺은 것도 이때다.

그가 특전사로 배치돼 폭파 주특기병으로 병역을 마친 것은 시위전력의 영향이었다. 데모하다 끌려온 사병을 더 혹독한 곳에 배치됐다. 12·12 신군부 쿠데타 때 반란군의 총에 맞은 정병주 특전사령관에게 표창을 받기도 했다.


사법고시 합격 통지서는 유치장에서 받았다. 5·18 광주항쟁이 벌어지기 하루 전 비상계엄에 따른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체포된 상태였다. 체포 당시 예비 장인·장모 앞에서 권총에 겨누인 채 수갑을 차고 끌려갔다. 그는 사법시험 2차를 준비하면서도 학생운동을 주도한 '시위 모범생'이었다.

‘학생운동’의 꼬리표는 끝까지 그를 괴롭혔다. 사법연수원 시험을 1등으로 통과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차석이 됐다. 원하던 판사 임용도 영문도 모른 채 불발됐다. 당시 12등이었던 고승덕 변호사는 판사로, 상위권이 아닌 박원순 서울시장은 검사로 임용됐다. 어쩔 수 없이 변호사의 길을 택했다. 이후 사법고시 동기인 박정규 전 민정수석의 인연으로 변호사 노무현과 인연을 맺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에 기여한 공로로 청와대에 입성한 그는 민정수석으로서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 내각 구성을 주도했다. 인사는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강금실 당시 민변 부회장을 법무부장관으로, 이창동 감독을 문화부장관으로, 이장 출신의 김두관 군수를 행정자치부 장관으로, 고영구 인권변호사를 국정원장으로 임명하는 인사였다. 이용섭 초대 국세청장이나 반기문 외교보좌관도 파격 인사로 손꼽힌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후 그는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정치권에 발을 딛었다. 19대 총선에서 지역구를 부산 사상으로 선택하자 '반신반의'하는 평가가 이어졌다. 한나라당의 텃밭에서 지역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지 여부였다. 결국 신예 손수조 후보를 넉넉하게 물리치고 뱃지를 달았다.

여세를 몰아 같은 해 열린 대선 후보로 나섰다. 무소속 안철수 후보와의 야권 단일후보 협상이 결렬됐으나 안 후보의 돌연 사퇴로 당선 문턱까지 갔다. 그러나 박근혜 후보와 약 100만표 차이로 석패했다. 그가 획득한 1469만표는 대선 패배 최다득표다.

△1953년 경남 거제 출생 △경남중·고 △경희대 법학과 △1980년 22회 사법시험 합격 △1983년 사법연수원 12기 수료(법무부장관상) △법무법인 부산 대표 변호사 △ 1996년 부산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 민변 부산-경남 변호사모임 대표 △2003년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2007년 대통령비서실장 △2009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위원회 및 상임집행위원장 △2010년 재단법인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 △2012년 19대 국회의원 △18대 대통령선거 민주통합당 후보 △민주통합당 대표대행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5주기 추도식이 거행된 2014년 5월23일 오후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오른쪽 두번째)이 추모영상을 보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사진=뉴스1

[키워드=노무현]
두 사람이 만난 것은 노 대통령의 변호사 사무실에서였다. 문 의원은 저서 '운명'에서 그를 "소탈했고, 솔직했고, 친근했다. 나와 같은 세계에 속한 사람이라는 느낌 같은게 있었다"고 회고했다.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된 '노무현·문재인 합동법률 사무소'는 그렇게 탄생했다.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떨치던 두 사람은 노 변호사가 13대 총선에서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의 '러브콜'을 받고 국회에 입성하면서 헤어지게 됐다. 노 변호사는 신군부와 5공의 핵심인 허삼수씨에 맞서겠다며 연고도 없는 부산 동구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 기간 문 의원은 법무법인부산 대표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측면 지원을 하다가 2001년 노 의원의 대선 행보에 다시 한 배를 탔다. 민주당 후보 국민경선에서 부산과 울산을, 대선에선 부산선대본부장을 담당했다.

문 의원은 대중에게 노 전 대통령의 '친구'로 각인돼 있다. 2002년 대선 시절 부산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은 문 의원을 두고 노 전 대통령은 "사람은 친구를 보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고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입니다"라고 인사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그러나 실제 노 전 대통령과 문 의원은 6년 터울이고 사법고시도 5년 차이다. 실제 이들은 상호 깍듯하게 높임말을 썼다. 문 의원은 "웬만하면 '형님'이란 말을 잘하는 성격인데 '선배님'이란 호칭도 못꺼냈다"고 털어놨다.

대선 승리 후 청와대 민정수석 제의를 받았다. '민정수석으로 끝내겠다', '정치하라고 하지 말아달라' 2가지 조건을 걸고 청와대에 입성했다.

총선을 앞두고 영남 출마 압박을 받던 그는 청와대에 들어온 지 1년 만에 사퇴하고 아내와 네팔 히말라야로 떠났다. 대통령 탄핵소식은 여기서 들었다. 귀국 후 대리인을 맡아 탄핵 기각 결정을 이끌어냈다. 그 뒤 다시 시민사회수석으로 청와대에 재입성했고 민정수석을 거쳐 참여정부 마지막 비서실장을 지냈다.

노 대통령이 봉하마을에서 서거하고 나선 장례 절자 등을 도맡았고 가족들 곁에서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이후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가난이 가져다 준 인연=책]
문 의원의 부모는 6·25 전쟁 발발 이후 중공군의 개입으로 연합군이 후퇴를 결정하면서 대대로 살아오던 함경남도 흥남을 떠나야 했다. 행선지도 모른 채 미군의 피난 선박에 몸을 실었다. 영화 '국제시장' 장면 그대로이다. 그는 지난 연말 '국제시장'을 보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도착한 곳은 경남 거제 피난민수용소였다. 문 의원은 그런 피난살이 중에 거제에서 태어났다.

빈손으로 피난길에 오르다보니 문 의원의 부모는 주로 허드렛일을 하며 끼니를 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포로수용소에서 막노동을, 어머니는 계란 행상을 했다. 문 의원이 학교에 입학할 때 쯤에는 부산 영도로 이사를 왔다. 아버지는 양말 장사를 하다가 빚만 잔뜩 졌다. 문 의원은 그의 책에서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무능했다"며 "가난은 나를 주눅들게 만들었다"고 털어놨다. 아버지는 그가 제대한 직후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문 의원은 아직까지 자전거를 타지 못한다. 자전거를 살 경제적 여유가 없다보니 타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했다. 어릴 때 가장 큰 소원은 '자전거를 타보는 것'이었다. 천주교를 종교로 삼은 것도 배고플 때 수녀들이 주는 사탕이 인연이 됐다.

빈부격차를 깨닫게 되면서 문 의원은 친구네 집을 가지 않는 대신 책을 좋아하게 됐다고 했다. 닥치는 대로 읽다보니 야한 소설도, 사상계 같은 의식있는 잡지도 접하게 됐다. 문 의원은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는지는 나 조차도 알 수 없을 정도"라고 털어놨다. 그는 지금도 서재에 있는 수천권의 책들을 가장 소중한 물건 중 하나로 꼽는다.

문 의원과 군 시절 교육장교와 사병 관계로 만난 노창남 전 합참특수작전과장은 “유신 시절 군 장교인 나한테 리영희 선생이 쓴 ‘전환시대의 논리’를 신문지에 싸서 읽어보라고 권유한 적이 있다”며 “28년 뒤 우연히 만났는데 ‘제가 준 책을 어떻게 했느냐‘고 물어 깜짝 놀난 일화가 있다”고 말했다.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선경선후보가 2012년 9월16일 경기 고양시 고양체육관에서 열린 제18대 대통령선거후보자 선출을 위한 서울 순회 경선에서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사진=뉴스1

[연관검색어=운명, 안철수]
문 의원은 노 대통령을 만나고 떠나보내야 했던 것을 노 대통령의 유서를 인용해 '운명'이라고 했다.

그는 그의 책 ‘운명’에서 “술을 한잔 마시면 가끔 옛날을 추억하게 되는데 ‘내 인생에서 노무현은 무엇인가’ 묻곤 한다”며 “그는 내 삶을 굉장히 많이 규정했고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의 삶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운명이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그것이 꼭 좋았냐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할 수 없을 것 같다”며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도 너무 많아서다”고 덧붙였다.

노 대통령과의 인연을 담은 이 책은 출간되고 1년여만에 23만권이 팔리며 문재인의 이름을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2012년 대선 후보의 발판을 마련했다.

최근에는 안철수 의원과의 관계가 화제가 됐다. 안 의원 측근들이 발간한 대선비망록인 ‘안철수는 왜?’에서 안 의원은 “2012년으로 돌아간다면 문재인 의원과 단일화를 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발언이 나와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2012년 대선 당시 문 의원에 비해 월등한 지지율을 보였던 안 후보는 야권 통합이 이뤄지지 않자 문 후보 지지발언과 함께 사퇴했다.

이와 관련 문 의원은 6일 기자간담회에서 “각자가 자기 위치에서 복기하고 평가하는 것”이라며 말을 아꼈다.

한편 안 의원은 “책을 발간하는 과정에서 사전에 저와 상의한 바 없다”며 “지난 대선과 이후 정치적 선택은 전적으로 저의 책임”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말말말=참여정부를 부산정권으로 생각해달라]
"나는 부산 사람들이 왜 참여정부를 부산정권으로 생각하지 않는지 이해가 안간다. 이번 지방선거가 그런 강고한 지역주의를 허무는 선거가 됐으면 좋겠다."

2006년 문 의원은 열린우리당 부산시당 기자간담회에서 이 같은 발언을 했다가 크게 혼쭐이 났다. '부산정권'을 부각시켜 지역주의를 부추겼다는 비판적 보도가 일파만파 커졌기 때문이다. 지방선거에서 열세를 보이고 있으니 선거에 도움이 되게 발언을 강하게 해달라는 요구를 받고 난 뒤였다.

특히 열린우리당 당원들이 비판적이었다. 광주와 호남 지역의 지지로 참여정부가 출범한 것을 잊은 부적절한 발언이라는 비난이 이어졌다.

문 의원은 "내가 평생동안 제일 많이 욕먹은 일"이라며 "마음속에 상처로 남아있고 정치가 더 싫고 무서웠다"고 토로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민정수석에서 사임했다.

1980년 서울의 봄 직후 교정에서 동료 후배들과 함께 한 사진./문재인 의원실 제공.

[이 한 장의 사진]
1980년 서울의 봄 직후 교정에서 동료 후배들과 함께 한 사진. 이 해는 문 의원에게 특별한 해다. 8월 경희대 법학과를 졸업했고 그해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당시 코스모스 졸업이라고 부르던 가을학기 졸업이었는데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아 졸업사진이 없다.

그는 그의 책에서 “그냥 친구 후배들로부터 축하받고 소주 한잔 하는 것으로 9년만에 대학졸업을 자축했을 뿐”이라고 회상했다.

1980년 4월 학내시위 와중에 22회 사법시헙 2차 치렀다. 두세달 공부를 못했기 때문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도 “시위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고 털어놨다.

5.15 서울역 회군이 있고 이틀 뒤. 5월17일 비상계엄 때 강화도로 장인어른의 농장에 갔다 돌아오던 버스에서 경찰에 끌려갔다. 처가 식구들 앞에서 권총 위협을 당하고 수갑에 채워져 청량리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됐다. 시위 배후를 캐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 곳에서 사법고시 합격 소식을 들었다.

[대표법안]
그가 지난해 6월 발의한 ‘사회적 가치 기본법’(공공기관의 사회적 가치 실현에 관한 기본법안)은 세월호 참사 이후 심도 깊은 고민 속에 나온 법안이다.

개정안은 사회적 가치를 실현한 공공기관에 인센티브를 주고 대통령 직속으로 사회적 가치위원회 설치 등을 골자로 한다. 아울러 정부는 사회적 가치 실현을 위한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사회적 경제활성화계획을 수립하도록 했다.

공공기관을 평가할 때 기관의 경영효율성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사회적 가치를 실현했는지도 평가 의무항목에 넣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정부조직을 개편하는 식의 땜질식 처방이 아니라 정부가 사람의 가치를 우선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는 게 문 의원 측의 설명이다. ‘사람이 먼저다’라는 문 의원의 슬로건과 맞닿아있는 법안인 셈이다.

60명이 공동발의한 이 법안은 현재 기획재정위원회에 계류되어 있는 상태다.

국회의원 126인이 2012년 공동발의한 최저임금법 일부 개정안도 환경노동위원회에 여전히 묶여있다. 임금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는 가사노동자에게도 최저임금이 적용될 수 있도록 하고, 최저임금에 물가상승률을 추가하는 등의 최저임금 인상기준 내용이 담겼다.

[요주의!]
국회 입성 이후 눈코뜰 새 없는 바쁜 나날을 보냈다. 노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주목을 받은 뒤 곧바로 대선레이스에 돌입했고, 대선 패배 이후에는 지지세력을 다독이느라 자신만의 시간을 갖지 못했다.

이어 벌어진 지방선거와 재보궐 선거에서도 지원유세의 단골손님을 활약했다. 그러다보니 제대로 된 의정활동을 펼치지 못한 것은 최대 아킬레스건이다.

참여연대에 따르면 문 의원이 국회 입성 이후 발의법안은 불과 5건이다. 이 중 본회의 뿐 아니라 상임위를 통과한 법안도 전무하다.

그나마 2012년 22%에 머물던 본회의 출석률이 2014년 96%까지 오른 것은 의미가 있다. 현 상임위인 국방위원회도 85%의 출석률을 기록 중이다.

그래픽=이승현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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