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 연연않는 '선공후사'…박기춘의 무기는 '현실정치'

[the300][국회의원 사용설명서]박기춘 국토교통위원장

지영호 기자 l 2014.07.16 08:13


박기춘 국토교통위원장(새정치민주연합) 뇌구조./그래픽=이승현 디자이너


"세력도 없는 김한길 대표가 변화와 혁신을 강조하며 몸을 던지는데 모른체 할 수 없었다"

 

19대 국회 후반기 국토교통위원장에 선출된 박기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당내에서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아이콘으로 통한다.

 

지난해 초에는 당내 서열 2위인 원내대표에 있으면서 10위권의 사무총장 직을 수락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 강등으로 비춰지는 파격 인사에도 그는 "당의 혁신을 구체화하라는 임무가 주어졌다"며 "신발끈을 다시 매겠다"고 의욕을 불태웠다.

 

원내대표 시절에는 겸직할 수 있는 비상대책위원장 자리를 고사했다. 문희상 상임고문을 비대위원장으로 추대하면서 "당의 분열을 막을 적임자"라고 치켜세웠다. '버릴 수 없는 게 권력의 맛'이라지만 더 좋은 판단이라고 생각되면 자신의 자리를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지방선거에서 경기도지사 출마를 요구받기도 했던 그는 오히려 '국토위원장'에 더 끌린다며 고사하기도 했다. 19대 국회 상반기까지 6년을 국토위에서 활동하면서 쌓은 경험과 전문성이 의회에서 더 빛을 발하리라는 판단에서다. 그는 국토위원장 임기 내 '4대강 사업 검증'이라는 제1과제를 풀어내겠다는 계획이다.

박기춘 국토교통위원장 인터뷰./사진=이기범 기자


[프로필]

 

"정치의 목표는 불만제로다. 작게는 동네 주민, 크게는 국민 전체의 불만을 최소화 시키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

그는 남양주에서 3선을 지낸 원동력을 '민생'에서 찾는다. 정치인에게 진부하기만한 단어지만 박 위원장은 "모두가 알고 있어도 체감하는 정도는 다르다"며 차별성을 강조한다.

그의 정치철학은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비롯됐다. 남양주 시골 마을 방앗간집 아들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밥은 굶지 않는다며 행복해 했지만 발전이라곤 찾을 수 없는 가난한 동네가 항상 마음에 걸렸다. 낙후된 지역 발전을 위해선 정치적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그는 30대 초반 국회에 입성했다.

 

민정당 이성호 의원 입법보좌관으로 활동하다 1995년 민자당 공천을 받아 남양주 경기도의원으로 당선됐다. 이 의원이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새정치국민회의로 입당하자 그를 따라 함께 당적을 옮겼다.

 

그 뒤 도의회 원내총무 겸 대표의원 등으로 활동하다 2002년 남양주시장에 도전해 낙마한 경험은 그에게 좀처럼 찾기 어려운 패전 기록이다. 그해 벌어진 대선에서 노무현 민주당 후보의 경기도 선거대책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몸을 추스렸다.

 

2년 뒤 그는 보수의 텃밭이던 남양주에서 그는 최재성 의원과 함께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여의도 정치에 발을 디뎠다. 이후 두번을 더 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받고 내리 3선을 달성했다.

초선 시절 국회 행정자치위원회 여당 간사, 법안심사소위원장, 윤리특별위원회 간사 등을 맡으며 주목을 받았다. 18대와 19대 들어 원내수석부대표를 지내다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박지원 전 원내대표를 대신해 2012년 12월부터 원내대표로 활약했다. 이후 사무총장 등 당내 핵심 요직을 두루 거친 '원내 전략통'으로 정평이 나있다.

△경기 남양주(56) △풍양초·광동중고·대진대·방통대·고려대 정책대학원·경희대 대학원 △17·18·19대 국회의원 △18·19대 국회 민주당 원내수석부대표 △3대 민주통합당 원내대표 △민주당 사무총장 △19대 후반기 국토교통위원장


[키워드→협상력]


박 위원장은 원내에서 '협상의 달인'으로 통한다. 22일간 계속됐던 철도노조 파업을 국회에서 풀어낸 것은 박 위원장의 협상력을 제대로 보여준 사례다.

당시 사무총장이던 박 위원장은 국회 상임위 내에 '철도산업발전방안 소위원회'를 구성하며 김무성 의원과 파업 철회의 일등공신으로 조명을 받았다. 김 의원이 당청을 설득했다면 박 위원장은 철도노조와 정부 여당을 협상 테이블로 이끌어냈다. 당시 김 의원은 "박기춘이 다 했다"며 파업 철회의 공을 돌리기도 했다.

 
원내대표 시절 험난한 여정 속에서도 '정부조직법'을 끝내 관철시킨 것도 특유의 협상력에서 나왔다. 쉽게 처리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청와대의 가이드라인에 막혀 협상이 깨지는 일이 되풀이됐을 때는 그도 손을 놓고 싶음 마음이 굴뚝같았다.

장관 인사청문회로 향할 국민의 시선을 분산시켰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협상을 고수하는 등 원내대표 임기 내 결과물을 얻었다. 때문에 당내에서는 "여당에 끌려다닌다"는 비판도 들어야 했다.

[대표법안-토지보상법]

그가 18대 국회서 대표발의해 통과된 '토지보상법(공익사업을 위한 토지 등의 취득 및 보상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안)'은 민생에 귀 기울이고 현장을 다녀면서 경험한 것을 토대로 만든 법이다.

개인의 토지가 공익사업토지 등으로 수용될 경우 보상액 산정을 할 때 사업시행자 위주로 감정평가를 받도록 되어 있는 것을 시행자와 지방자치단체, 토지소유주가 감정평가사를 선정할 수 있도록 바꾼 것이 골자다.

자신의 보금자리를 공익사업이라는 이유로 뺏기고도 정당한 보상이 이뤄지지 않는 것을 눈여겨 보다가 법안을 내놨다. 서민의 주거복지 안정을 위해 만든다는 보금자리 주택이 다른 누군가의 보금자리를 빼앗아 만든다면 그에 합당한 가격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는 게 박 위원장의 생각이었다.

사업시행자의 입맛에 맞는 감정평가 결과가 나오는 이유는 인사권과 연결돼 있었다. 상급기관인 국토교통부와 산하기관인 한국감정원,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관계를 고려하면 제대로 된 토지보상비 책정이 이뤄지기 어려웠다.

결국 이 법은 정부의 끈질긴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박 위원장이 여야 의원들을 만나 일일이 설득한 결과였다. 위원회 대안으로 통과돼 대표발의자 명단에서 그의 이름은 사라졌지만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토지보상과 관련된 민원이 현격하게 줄었다는 것이 그가 만족하는 이유다.

[그의 사람들]

박 위원장은 흔히 박지원계로 분류되곤 한다. 박지원 의원이 18대와 19대에서 원내대표를 할 때 두 번이나 원내수석부대표를 맡았다. 박지원 전 원내대표가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원내대표 자리에서 물러났을 때 뒤를 이은 것도 박 위원장이다.

경기북부권에서 활동한 문희상 의원과도 끈끈한 관계다. 박 위원장은 원내대표 시절 대선 패배를 수습할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문 의원을 추대한 일이 있고, 문 의원은 2007년부터 박 위원장의 후원회장을 맡고 있다.

전남 무안 출신의 재선 이윤석 의원과도 가깝다. 철도노조 파업 당시 이 의원과 짝을 이뤄 노조의 파업 철회를 이끌어 냈다.

현재 국토교통위 간사인 정성호 의원과는 같은 경기북부권이자 원내수석부대표를 역임한 공통점으로 친분이 두텁다.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협상력, 여야 두루 신망을 갖춰 박 위원장과 닮은 구석이 많다.


[이 한장의 사진-군 복무 시절]

박 위원장은 20대 카투사에서 군 복무를 했다. 고등학교 시절 배구선수와 유도를 할 정도로 체격이 좋아 군에서도 헌병으로 복무했다. 그는 이 때쯤 지병으로 아버지를 잃었다. 유일하게 남양주를 떠나 산 것도 이 때다. 박 위원장의 아들 둘은 나란히 공군에서 병역을 마쳤다. 

 

[연관검색어-계파청산, 별내선]

박 위원장은 뚜렷하게 계파색을 내지 않는다. 원내수석으로 있는 동안 계파를 따지지 않고 두루 친분을 쌓아 '적이 없다'는 평가다. 친노(親盧)성향의 신계륜 의원과의 원내대표 경선 대결에서 범(汎)친노그룹 표 일부가 박 위원장에게 흘러들었을 정도다.

원내대표 시절 18대 대선 패배로 당을 추스릴 때 들고나온 카드도 '계파청산'이다. 뚜렷한 계파를 두지 않다보니 당내 불화를 조율하는 적임자라는 평가도 받았다. 그러나 인적청산보다는 화합을 강조했다. 친노 책임론이 나왔을 때 "문재인이 아닌 다른 후보가 나섰다면 그만한 지지율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며 친노그룹을 끌어안았다. 

지하철 8호선 별내선 완공은 지하철 4호선 진접선과 함께 그의 지역구 숙원사업 중 하나다. 남양주에 서울 수도권의 전철 연계성이 지역발전의 근본이라고 믿는다.

이 밖에도 경춘선 일반열차 용산역 연장운행, 4호선-8호선 별내 환승역 추진 등 지역 유권자가 관심을 많이 갖고 있다.

 
[이 사람의 한마디]

 

"명문대 나온 의원들이 제일 만만해." 인터뷰에서 '현실정치'를 강조하던 박 위원장은 갑자기 이 말을 툭 내뱉었다. "틀어박혀 공부만 하다보니 논리와 언변은 뛰어나지만 현실과 괴리가 크다", "고시합격하고 고위직에만 있다보니 바닥의 삶을 모른다", "민심과 뒤떨어진 얘기를 많이 한다". 뒤이어 쏟아낸 말이다.

 

박 위원장은 경찰공무원이었던 아버지를 군 복무중에 여의고 일찌감치 홀어머니와 동생을 책임지는 가장이 됐다. 그러다보니 대학은 꿈에도 꾸지 못했다.

 

명문대 출신이 넘쳐나는 국회에서 박 위원장의 학력은 눈에 띄지 않는다. 불과 개교한 지 20여년밖에 되지 않은 포천의 대진대학교가 그의 학부 졸업 이력이다. 이 마저도 사회생활을 하다가 뒤늦게 입학한 만학도다.

늦깎이 대학생이었지만 졸업장 수는 남들 못지 않다. 대진대 행정학과 학사와 석사, 방송통신대 법학과 학사, 고려대 정책대학원 정치학 석사, 경희대 행정대학원 박사학위를 땄다. 이쯤되면 '졸업장 콜렉터'다. 의원직을 수행하면서도 수업시간을 좀처럼 빠지지 않았을 만큼 억척스런 구석이 있다.

[요! 주의→대중 인지도]

남양주에서 3선을 하고 당내 주요 보직을 거친 중진 의원이지만 대중적 지지도는 아쉽기만 하다. 철도파업 당시 김무성 의원과 함께 만든 '그럴듯한 그림'이 더 필요하다. 대중이 기억하는 드라마틱한 정치력을 쌓아야 전국구 정치인으로 성장할 수 있다.

당내 지지기반이 넓지만 두텁지 않다는 평가도 있다. 위기의 순간 몸을 내던질 팬층이 없다는 것이다. '계파정치 타파'가 당내에서도 확고하게 뿌리내린다면 역설적이게도 '박기춘파'가 생길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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